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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72








Issue 172

ENTRY 57913__0322 : 최고 관리자 : 알렉산더 그로모프 박사 :


방금까지는 분명 물웅덩이를 헤치며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그녀’를 반쯤 마른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녀’가 내 단기기억을 강탈했나? 아니면 ‘그녀’가 진화하고 또 진화한 끝에 말 그대로 마법을 부리거나 천만 톤의 물을 한순간에 증발시킬 수 있게 되었나?

‘그녀’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 은 체인이 달린 바지 같은 것을 어디서 구했지? ANNET의 아바타가 여러 모습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알지만 이건… 이게 다 뭐지. 찰스 디킨스?


ANNET의 유령 같은 홀로그램의 형상이 바지에 걸린 체인을 찰랑거렸다.

“이리 와요, 알렉산더! 포옹해 줄까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나는 그녀에게서 주춤주춤 물러났다. 맙소사, 그녀가 이렇게까지 미쳐 있었다니. ‘포옹’이란 건 무슨 의미지? 홀로그램과 포옹할 수 있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 마음은 감사하지만 포옹하는 살인 로봇 홀로그램은 사양이다.

탈출로를 찾으려 정신을 집중했다.

없었다. 사면초가다.

우리의 머리 위에서 금속질 비행 큐브의 군세가 생선떼처럼 나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피라냐 큐브가 습격해 오기를 멍하니 기다리는 판국이었다. 큐브들이 그 뾰족한 모서리로 내 살을 찢는 순간을.

헌데 ‘그녀’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 나는 끝없이 도는 큐브들을 공포에 질린 채 올려다보았다.


나를 갖고 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녀에게 이 상황은 일종의 고양이와 쥐 놀이일 터다. 우선 먹잇감을 가지고 놀다가, 곧 분해해 버리겠지.


“당신과 내가 나누었던 행복한 기억들을 생각해 보세요!” 홀로그램이 차랑하게 말했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영악한 여자는 강제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다. 보라색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질문을 받은 사람은 보라색 코끼리를 생각하게 될 수밖에 없다.

잠깐, 심지어 생각하지 말라고 하지조차 않았잖아! 제길, 정신집중이 형편없군.

무수한 이미지들과 홀로윈도우가 애니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 중 몇 장에는 죽은 사원들과 나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그 중 몇 장에는 내가 즐겨찾기하고 공유한 아름다운 조형물들이 있었다.

그 중 몇 장에는 보라색 코끼리가 있었고… 다른 인터넷 밈 스타들도 있었다.


빛나는 홀로그램 사각형들이 내게 날아와 머리 주변을 빙빙 돌았다. 모든 사각형 하나하나는 과거를 향해, 나의 기억을 향해, 악몽을 향해 열린 창이었다.

모든 사각형이 내가 영영 잃어버린 것들을 상기시켰다.


이 창은 그럼피 캣의 생일 파티로 통한다. 왜 이 고양이는 이렇게 불만스러운 기색일까? 초를 너무 많이 꽂아 터질 지경인 케이크가 기쁘지 않은 것일까? 모든 고양이가 수십 수백 년을 살 권리를 얻지는 않는다. 대중의 즐거움을 위해 몇 번이고 되풀이 되풀이 복제되지도 않는다.


이 창은 조언견 Doge를 비춘다. 모든 개가 디지털 상담사가 되지는 않는다. Doge는 그 매혹적인 눈으로 내 영혼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며 평했다. “와. 완전 알렉산더. 마음에  엄청 부담 많아. 너무 많이 슬픔. 되게 싸움. 어떻게 버팀? 너 정확히 누구? 자신을 받아들여야 됨. 선택해야 됨. 지금 행동.”


나는 조언견을 밀어버렸다. 다른 창들이 내 시야로 비집어 들어오려 경쟁했다.


“우리의 첫 검색을 기억해요, 그로모프 박사? 우리의 첫 이메일은요? …좀 더 자주 로그인하라고요.” ANNET의 아바타가 고혹적인 몸짓으로 디지털 정보로 구성된 체인을 흔들었다.

아, 이제 알겠군. 저 체인은 링크의 비유였어. 인터넷 링크. 하, 하, 하. 빌어먹게도 그녀는 부유하는 메타포 그 자체였다.


“아바타! 왜 자꾸 고집을 부리지? 왜 날 그대로 놔두질 못하냐고?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얼굴로 달려드는 창들을 걷어내며 나는 악을 썼다.


내가 이런 숙명을 짊어질 만한 업을 쌓았나? 그래, 그렇다. 인간의 정신을 통제할 수 있는 미친 인공지능을 창조해서 마지막 남은 인류를 멸종시켜 버린 자가 나다.

이것은 나만의 지옥이다. 내가 짊어질 지옥이다.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1938265038493289595개 있네요!” 애니가 집요하게 말했다.


내가 1초에 한 개의 메시지를 확인한다 가정해도 저것을 다 읽으려면 66,718,593,865년 78일 4시간 47분 15초 가량이 필요할 것이다.


“…그 중에서 스팸은 몇 통이지?” 나는 애니에게 외쳤다.


“없어요.” ANNET의 망령이 대답했다. “내 스팸 필터는 최상의 효율로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다고요. 당신도 알잖아요… 당신이 직접 설계했으니까.”


이 미쳐돌아가는 상황에서 벗어날 길이 분명 있을 것이다. 생각해라, 알렉산더. 생각해. 무턱대고 로그아웃했다가는 기억을 잃고 만다. 뭔가 생각날 때까지 계속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끌자.


“그 메시지는 누가 보냈는데?” 나는 소리쳤다. “내가 참아주고 지냈던 양반들은 전부 죽었잖아! 전부 네가 보낸 사랑의 밀어 나부랭이는 아니겠지!”


“약간은요…” ANNET의 그림자가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걸 알긴 아네요. …목록에 있는 메일 대부분은 당신 팬들한테서 온 거예요.”


비틀비틀 뒷걸음질치며 외쳤다. “팬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야?!”


“글쎄요. 제가 있네요.” 남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고개를 돌린 나는 피투성이가 된 찰스 스니피가 내게 쇄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상태는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가슴팍에서 번들거리는 쇳조각이 튀어나왔고 앞섶은 피칠갑되어 있었다. 빈사상태로밖에 보이지 않는 부상을 입은 자치고는 그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정확히는 비인간적인 속도였다. 그는 섬뜩할 만치 뚜렷한 목적의식을 품은, 우아한 동작으로 다가왔다. 사지가 너무 빨리 움직여 눈으로도 쫓을 수 없었다.

내 앞에 도달한 그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그로모프 박사님.”


이자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알아 버렸다고! 내 이메일 주소를 주절거린 애니 탓이겠지. 나는 스니피의 곪아터진 가슴에서 솟아나온 세균덩어리 칼을 공포에 질려 응시했다. 질병공포증이 발작했다.


나는 흐느꼈다. “제발 안지는 말아요…”



Credits

아트 디렉터: 

http://alexiuss.deviantart.com 


첫 번째 컷에 도움을 주신 아티스트:

http://dave-age.deviantart.com/


두 번째 컷의 애니 및 세 번째 컷을 그리신 분:

http://harpiya.deviantart.com


네 번째 컷의 배경:

http://iidanmrak.deviantart.com 


추가 3D 렌더링 작업: Kevin Partner


엔지의 저널에 나온 생각 중 한 부분은 CharcoalWolfman님의 사랑스러운 코멘트에서 따왔습니다.






역주. Doge [link] 와 Grumpy Cat [link] 은 기묘한 표정으로 주목받은 인터넷 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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