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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73











Issue 173

ENTRY 57913__0326 : 최고 관리자 : 알렉산더 그로모프 박사 :


애니는 사랑과 용서와 포옹과 오해 운운하는 말을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린 나는 등 뒤의 스니피에게 꽉 잡혔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내 귓가에 속삭이며 그는 피에 젖은 쇳조각을 내 목덜미에 들이밀었다.

나는 흐느끼며 도망치려 했지만 그는 완강한 팔로 나를 붙들었다.


“그대로 따라하세요.” 스니피가 말했다.”R-관리자 컨트롤-ANNET 종료 프로토콜 실행.”


관리자 명령어?!

스니피가 어떻게 별안간 관리자 명령어에 대해 알아냈지?

생각이 다른 곳으로 새어나갔다.

Directorate의 관리자 명령어가 아직 작동할 것인가? 애니가 단순히 내 말을 듣고 종료될까? 그렇게 일이 간단할까? 그렇다면 내가 유레카를 폭격한 일은 무의미했단 말인가?! 아니, 불가능하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수는 없다.


“뭐요? 진심으로 고작 그걸로 애니가 꺼질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혼미해진 정신으로 물었다.


“예. 그러니까 닥치고 읊기나 하시죠!” 스니피는 내 어깨를 쥐어짜듯이 잡으며 채근했다.


나는 외쳤다. “R://관리자 컨트롤: ANNET 종료 프로토콜 실행!”


명령어는 즉각 애니를 중지시켰다. 그녀는 충격을 받은 기색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머리 위에 메뉴가 띄워졌다.


정말로 종료하시겠습니까?

저장되지 않은 모든 정보를 잃게 됩니다.


예/ 아니오


이 예상치 못한 상황전개에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저장되지 않은 정보. 거기엔 내 기억도 포함될 것인가? 나는 나 자신의 기억을 영영 지워 버리는 것인가? 내가 감히 여기에 ‘예’라고 말해도 괜찮은가? 그녀를 그냥 단순히 잠들게 하는 일은 불가능할까?


“그러겠다고 하지 않으면 파상풍에 걸리실걸요.” 스니피는 이를 갈며 속삭였다. 피로 번들거리는 칼날이 한층 더 목과 가까워졌다.


애니는 상당히 언짢아 보였다. 그러나 지금의 내게는 파상풍이 더 가까운 위협이다. 애니는 팔짱을 끼며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승리한 것은 내 세균 공포증 쪽이었다. 나 스스로 나의 뇌를 적출하는 꼴만은 되지 않기를 빌며 중얼거렸다. “예.”


ANNET의 홀로그램이 명멸했다.

애니는 픽셀로 부서지며 절규했다. “왜 이래요, 자기? 대체 왜!”


스니피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이걸로 끝이야!”


나는 잠시간은 미소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픽셀화되는 것이 애니의 홀로그램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 그 감정은 공포로 바뀌었다. 이변은 애니가 서 있던 자리에서부터 소용돌이를 그리며 퍼져나갔다. 도시 전체가 깜박거리며 해체되고 있었다. 가로등은 증발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시야에 들어오는 고층건물들의 모서리가 지직거리기 시작했다.


이 세상 전체가 홀로그램이었다고? 전부 시뮬레이션에 불과했다고? 아연해 입을 벌린 채 나는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순간에, 모든 것이 끔찍하게 어긋났다.

온 세계의 존재가 번뜩임과 함께 사라졌다.

피부에 스치는 공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다.

울려퍼지는, 죽은, 정지된, 완전무결한 정적이 청각을 채웠다.

보이는 것은 오직 푸른빛. 영원히 이어지는 푸른빛뿐이다.


몸이 없기에 나는 움직일 수 없다.

입이 없기에 나는 비명지를 수 없다.


ANNET의 시스템 충돌 오류 보고가 시야 가운데 떠다닌다. 



Credits

아트 디렉터: 

http://alexiuss.deviantart.com 


일러스트레이터: 

http://iidanmrak.deviantart.com 




역주. '입이 없기에 나는 비명지를 수 없다' 는 

       할란 엘린슨의 SF 공포 소설인 <I Have No Mouth, and I Must Scream(나는 입이 없으나 비명을 질러야 한다)> 의 인용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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