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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0


"나는 지 캡틴ZEE CAPTAIN, 캡타니아에 있는 모든 것들의 영광스러운 지배자일세!"

 그 말과 함께 캡틴은 아주 길고 극적인 몸짓을 취하며 얼어붙은 쓰레기장 쪽으로 손짓했다.


"보라… 캡타니아를! 위엄이 넘치는 사랑의 파라다이스에서 그대는 가장 번영할지니! 축하하네!"


나는 눈썹을 올리며 대체 가장 먼저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고민했다. 데드 존 관광 가이드부의 감정반응 고글이 렌즈 한 짝을 들어올려서 내 표정변화를 반영했다. 이 ‘눈 깜빡임으로 동력을 공급하는’ 고글이 모든 전자기기가 망가진 지금까지도 이렇게 작동할 줄 누가 알았을까? 


나는 간신히 물었다. “그래서,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거참 아둔한 친구로군!" "방금 말하지 않았나! 나는 지 캡틴이라니까! 그렇지만 다른 흥미진진한 이름들도 아주 많이 갖고 있다네: 전하, 호수의 여인, 우상, 천하-제일의 영웅, 유일한 전능자, 아니면 나으리… 다만 지 캡틴이 썩 걸맞는 이름이지!"


나는 자칭 군주를 수상쩍게 바라보았다. 그 "캡틴"은 정말이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갓 구운 방사능 한 접시 더 드실 분? 저 주절거림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고 판단을 내렸다. 군주? 통수권자? 아가씨? 캡틴? 뭐든간에.


"세상이 망해가는데 기껏 같이 있는 사람에게 까탈스럽게 굴어야 할 만한 환경은 아니지." 나는 생각했다. "게다가 뭐, 사람이 좀 맛이 갔다고 해서 누가 다치는 건 아니잖아, 안 그래?" 지친 정신이 꽤나 이상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뭔지 모를 기묘한 이유로 나는 캡틴에게 성별을 부여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을 하려고 애써 봐도 소용이 없었다. 내 머리가 어딘가 이상해진 게 틀림없다.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할 때마다, 내 사고과정은 흐름을 놓치고 그저 "캡틴" 자체에 안착했다. 난 이 묘한 상황을 "뇌종양 가능성 / 피폭 / 극도의 탈진" 정도로 분류하고 넘어갔다.


“전 찰스 스니피입니다.” 나는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이 불가사의한 양반은 폐허의 모든 사람 모양을 한 자들이 그렇듯 방독면을 끼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방독면과는 조금 달랐다. 빛을 특정한 방향으로 반사하는 방독면은 언제나 벌쭉 웃는 것처럼 보였다. 캡틴은 생각에 빠져서는 그 방독면의 아랫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스니피, 흐으으음음? 스닙스 스냅스 스눕스 스니이이입즈 스닙피 스냅퍼 스나이핑 샤이니펭 즈나이피 스누페이 스나이페이 스니삐!" 내 이름의 수많은 변형을 실험하듯이 캡틴이 흥얼거렸다. 나는 끝나지 않는 고함을 들으며 잠자코 서 있었다. 내 성이 대체 얼마나 다양하게 개조될 수 있을지 궁금해하면서.


내 침묵을 눈치챈 캡틴은 갑자기 나를 끌어안고는 외쳤다. "걱정하지 말게! 캡타니아는 설령 자네 같은 코찔찔이라도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제공한다네! 왜냐면, 자네는 불운한 상황으로 막 지원자를 받기 시작한 내 새로운 스나이핑부에 아주 완벽한 지원자감일세. 이렇게나 딱 맞는 이름을 가졌으니, 내 부서에 오게 된 것이 숙명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불운한 상황? 숙명?" 나는 중얼거렸다.


"피아노가 떨어진다고 해서 두 번 부딪히진 못하는 법! ... 아니던가?" 캡틴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초현실적인 일이 거기서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나는 캡틴을 쳐다보다가 캡틴을 따라 하늘도 올려다보았다. 폭풍을 부를 듯한 두툼한 잿빛 눈구름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하늘을 빤히 쳐다보았다. 족히 수 분은 된 것 같다.


“이제 좀 움직여도 될까요?” 그제서야 나는 적잖이 서먹하게 물었다.


"쉬쉬쉬시시시…" 캡틴이 나를 조용히 시켰다. "피아노가 언제 다시 떨어질지 모르잖나!"


"그러게요" 나는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한 피곤한 다리를 털었다.


"떠나야 하네!" 캡틴이 갑자기 빙글 돌았다. "저 구름이 날 쳐다보게 허락하지 않겠어!"


나는 캡틴이 어디까지 제정신에서 멀어질 작정인지 불안해하며 중얼거렸다. "저거 진심이야?" 


"아 하지만 내게 해결책이 있지!" 캡틴은 까만 트렌치 코트의 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어서 무언가를 꺼냈… 흰 쌀 같은데.

나는 캡틴이 결혼식 피로연마냥 쌀을 앞으로 집어던지는 것을 보며 내뱉었다. "얼씨구." 


"가세나! 우리는 쌀이 남긴 흔적을 쫓아야 한다네 스니피 군! 다만 사뿐사뿐 밟게! 아주 사뿐사뿐하게!" 캡틴은 소리치고는 나를 잡아끌며 앞으로 행진했다.


지금 내가 무슨 상황에 말려든 거야…?



Credits

아트 디렉터 : http://alexiuss.deviantart.com/
일러스트레이터 : http://proxygreen.deviantart.com/
저널 일부 : http://izzi1313.deviantart.com/



역주. 캡틴이 부르는 노래는 프랑스어 동요 <Alouette>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wEvkpleC3Zw

  종달새, 예쁜 종달새야 / 네 깃털을 뽑아 보자 / 머리깃을 뽑고, 머리깃을 뽑고, / 머리깃, 머리깃, 종달새, 종달새…… (후렴 반복)










Entry ___1:








인간 대상 찰스 스니피Charles Snippy

: G-Dir 사원 사용자 ID #04477645 :

소속 : 데드 존 투어 가이드 :


 이 치아 메모리 카드와 이 안에 남겨진 메시지를 찾아낼 누군가에게…


 내 이름은 찰스 스니피다. 아마 내가 이 지구 위에 유일하게 남은 제정신인 인간일 것이다. 그쪽이 이 메시지를 이해할지 모르겠다. 그쪽이 이 데이터 카드에 새겨진 0과 1들을 해독하기는 할 수 있을지, 미세장치들이 오래 갈지, 이걸 구성하는 플라스틱과 철조각들이 세월에 쓸려 먼지가 되는 건 아닐지, 이 장치를 감싼 티타늄 외장이 제자리에 있을지 아니면 변화무쌍한 풍경의 일부가 되어 영영 사라질지도, 전혀.

 하지만 나는 아직 훗날의 누군가가 나에 대한, 아마도 당신에게는 먼 과거일 이야기를 찾아내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쪽이 뭔가 쓸만한 걸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하다못해 내 처참한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기라도 하거나.


 만약 그쪽이 아직 인간이라면, 이것은 그쪽의 조상이 탐욕과 오만으로 문명을 무너뜨렸던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만약 그쪽이 아예 다른 종족이라면, 이건 기나긴 진화 끝에 우리에게 생명을 줬던 생태계의 균형을 무시한 인간이 어떻게 멸종해 갔는지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내 인생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이 메모리 카드 안에 일기 형식으로 들어 있다. Directorate의 치과 로봇이 “회복과정에서 아주 약간 아플 겁니다” 운운 장담하며 내 치아에 구멍을 뚫고 끔찍하게도 고통스럽게 카드를 심어넣던 날부터다.

  나는 그 이후로 내 인생을 스스로에게 혼잣말로 서술하고 있다. 예전에 내 “온라인 정신상담사”가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이성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으로 추천해 주었던 대로 말이다.

 왜 이성을 유지씩이나 해야 하는지 그쪽 입장에서는 궁금하겠지?

 그러니까…
 내 이성은 내 유일한 친구의 완전무결한 광기 덕분에 끝없이 시험받고 있다.
 내 친구란 건 물론 지 캡틴Zee Captain이다.
 지 캡틴이 누구냐고? 지금부터 전부 얘기할 작정이다.

어디부터 운을 떼야 하지?
음. 오늘 아침에 캡틴은 망원경 하나를 발견해서는 꼬박 하루를 “여자 꼬시기 예술”에 바쳤다.
유효기간이 남은 음식이나 피폭되지 않은 음식을 찾는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온종일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일이 생존보다 몇 배는 중요한 과업이라는 거다!

처음에는 논쟁이라도 해 보려 했지만, 캡틴이 내게 “신사의 작업걸기 수칙” 으로 가득 찬 서류철을 내게 쥐어주었을 때, 나는 그냥 비웃음으로 이 상황을 견뎌내기로 마음먹었다.

서류철을 넘겨다보니 그 안에는 물론 종이조각들이 덕지덕지 붙여져 있었다. 내용은 이랬다.

1단계. 소장품 중 가장 매력적인 흰색 탑과 판타롱을 입는다.
2단계. 망원경을 준비한다.
3단계. 작업 상대를 찾는다.
4단계. 작업을 건다.
5단계. 원하는 여성에게 적절하고 신사적인 비평을 보낸다.

6단계. 무례한 방해는 무시한다.

이렇게 멋들어진 대문자만 타이핑되는 골동품 타자기를 캡틴이 어디서 찾아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캡틴이 광고판 여인네에게 이야기를 거는 꼴을 몇 시간쯤 지켜본 끝에 나는 말했다. “그거 진짜 사람도 아닌 거 아시잖아요. 지금 그림이랑 얘기하고 계시는 거라고요. 저쪽은 대답도 못 한다니까요.”


내 지적에 캡틴이 대꾸했다. “흐음… 고건 확실히 대책이 필요할 법한 불균형한 곤경이군 그래. 인쩍 자원이라 그거지? 당장 조달해야겠어!”


그러고는 '망원경'이 내 쪽으로 스르르 90도 돌더니 나를 정면으로 마주한 채 멈추었다. 캡틴은 언제까지 날 이렇게 물끄러미 들여다보고만 있을 심산인지, 이러고 있는 게 나와 캡틴 모두에게 조금 전보다 상황이 나아지긴 했다는 뜻이 되긴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흠, 그래… 그러면 되겠군…”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그 직후 돌덩이처럼 단단한 감자 자루 같은 것이 내 뒤통수를 내리치고 세상이 새카매졌다.



나는 끔찍하게 불편한 자세로 광고판에 세로로 묶인 채 깨어났다. 시야의 반은 분홍색 가발로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빌딩들과, 먹구름과, 까마득한 아래편에 얼어붙은 땅바닥이 나머지 반쪽 시야에 들어왔다.


“아오, 좀!” 쿨럭거림과 함께 말하며 나는 징글맞은 가발을 머리에서 떨어내려 고개를 흔들었다.


머나먼 위치에서 보라색 망원 렌즈의 반짝임이 눈에 들어왔다. 캡틴이 저편에서 내 쪽으로 뭔가를 소리치고 있었다. “이러면 쫌 낫겠나?” 어쩌고 하는 소리를.


“저 빌어먹을 인간을 진짜!” 잇새로 중얼거린 나는 결박을 풀어내려 버둥거리며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래선 안 되었다. 내 버르적거림은 로프를 끊어낸 것이 아니라 광고판의 녹슨 지지대를 부서뜨렸고, 그러자 구조물이 통째로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끼익 소리가 나며 광고판은 나를 붙든 그대로 철제 프레임에서 떨어져나와 곤두박질쳤다. 하늘과 땅이 뒤집힌 횟수를 셀 수도 없다. 광고판은 전후좌우로 돌고, 떨어지고, 셀 수도 없는 발코니에 걸리고, 회전하고, 흔들리고, 날카로운 쇠와 플라스틱 조각을 흩뿌렸다. 40층째. 나는 바닥이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뼛조각과 살이 비산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 순간, 광고판은 또 한 번 발코니에 부딪히더니 별안간 지면과 평행을 그리며 허공을 미끄러져가기 시작했다. 요란한 소음은 더이상 없었다. 바람이 윙윙거리는 소리뿐이었다. 보아하니 광고판이 우연히 상승기류를 탄 덕에 거대한 연 비슷한 것으로 둔갑한 모양이었다. 잠시간 나는 위편에서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직후 광고판이 바닥에 격돌해 얼음을 파고들어가며 그 마찰로 로프를 끊고 나를 눈더미에 패대기쳤지만 말이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현기증이 밀려와 눈 위에 날개 달린 천사 같은 자국만 남기는 것이 고작이었기에, 나는 대자로 드러누운 채 내 곁에 선 캡틴을 올려다보았다.


“9점일세.”


“제 어디가 그렇게 불만인데요?!” 나는 빽 소리쳤다. “대체 왜 이런……?”


“여섯 번째로 뒤집힐 때 미소짓지 않아서 1점 감점.” 캡틴의 대답이었다. “시무룩한 선수는 고작해야 2등이라는 건 자네도 알잖나!”


캡틴을 목졸라 죽여야 할지 웃음을 터뜨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왜냐하면… 별 수 없잖아. 이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방사능으로 가득한 세계, 잠자리엔 변변한 지붕도 없는 이곳에서, 인간 연날리기 같은 걸 당하는 일은 어떻게 보면… 아주 조금은… 즐거우니까?


어쨌든 오늘 확실히 얻은 교훈이 있다. 절대로 캡틴이 무생물과 이야기하는 걸 바보 취급하지 말 것.



















Issue 2



캡타니아의 거주민들에게.

 

불미스러운 이야기이네만 오늘은 스티브 스티븐슨이라는 자의 끝없는 망상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네.

 

스티브는 달에 대한 무도한 반역죄를 범했네. 월면 비(非)착륙에 대한 부정주의 말일세. 1969년 7월 이전에는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건만 스티브는 그릇되기 짝이 없는 의견을 제기했다네.

 

이런 부정주의 사상을 피력한 죄를 물어 스티브는 실존문(門)에 의해 사형되었네.

그게 다일세.

각자 거주지나 직장으로 돌아가게.

무엇을 하건간에 실존문의 우발성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말게나.

문에 대한 사고는 문을 실현시켜 버릴 수 있어.

만약 불가해한 이유로 전술한 문을 발견하게 된다면, 지방 정부 당국(나) 의 허가 없이는 절대 그 탐욕스러운 손발을 대려 하지 말게.
그런 우아하지 못한 짓을 했다가는 각오한 적 없는 결과를 마주하게 될 걸세.

무한한 격려와 함께,
그대의 영광스러운 캡틴



 














Issue 3



컴퓨터가 완전히 박살난데다 살아남은 “네트워크 신호”도 없다는 현실을 인정했다고 해서, 캡틴이 순순히 이 짓거리를 그만뒀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캡틴은 내 손에서 부서진 핸드폰을 낚아채서는 진지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외주 기술지원부서” 에 전화하려 했다.


나는 캡틴이 헛된 짓을 하는 양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이쪽만 말하는 대화는 대략 이런 식으로 이어졌다.

“여보세요? 기술지원부인가?”


“빌어먹을! 자동응답기잖아!”


“그렇네”


“아니!”


“아마도!”


“이전 메뉴로!”


“21과 2분의 1가. 세븐티 비(seventy bee) 아파트” 


(보아하니 캡틴이 이곳의 주소를 지어낸 모양이다)

“허가? 허가는 나 캡틴이 했네!”


“프랑스의 왕이라고!”


“광고 백 개째”


“삼백사십사 개째!”


“남극 가정교사는 또 뭔가!”


“그냥 책임자랑 연결시켜 달래도!”


“오, 그대 저주받아 마땅한 흉악한 자동장치여!”


“아니, 기다리고 싶지 않다니까! 안 돼에에!”


(이 대목에서 캡틴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더니 젠체하며 내게 핸드폰을 쥐어주었다)


“들고 기다리고 있게, 그대여. 누가 대답하면 내게 알려주고.”

부서진 핸드폰을 캡틴에게 넘겨받는 순간, 그 오래 전 망가진 스피커에서 아주 잠깐 동안 대기 음악이 들렸다고 맹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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