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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 4d, 5, 5d







Issue 4

ENTRY 103__12 - 인간 대상 찰스 스니피 - 개인 ID 04477645.


오늘 나는 내 방염(防炎) 바지에 스테이플러로 대충 꿰매진 파란색 미니스커트를 입은 채로 깨어났다. 캡틴이 이런 옷가지로 나한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잠시 감이 오지 않았다. 캡틴의 등에 올라탄 파일럿이 “위이이잉” 하는 소리를 내며 도착하기 전까지는.

캡틴은 이 가면극에서 수 가지 역할을 동시에 맡고 있었다. 비행기, 비행기 엔진, 네비게이터, 수리공, 기지 사령관까지. 파일럿은 그냥 파일럿이었다. 한 손에 종이 모형비행기도 들고 있긴 했다.


“스튜어디스 스니피!” 캡틴이 호령했다.

“조종실에서 호출이 있었네!”


“됐습니다. 그쪽들 놀이에 장단 맞춰 주기 지쳤어요.” 나는 웅얼거린 뒤 눈 앞의 황량한 경치를 완상하는 시늉을 하며 돌아섰다. 캡틴의 등 같은 데 타고 싶을 리가 없다. 첫째로 올라앉을 자리도 없을뿐더러, 둘째로 파일럿이 제 영공(領空)을 목숨바쳐 지키겠답시고 대번에 날 밀쳐버릴 게 뻔했으니까.


“스튜어디스 스니피이이이! 자네의 반항적 지각행위를 비행일지에 기록하겠네!” 캡틴은 한층 목소리를 키우며 호통을 쳤다. “최악의 느림보로 이름을 알리고 싶은가? 그런 겐가?”

“그럴지도요.” 나는 가능한 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무래도 구조가 필요한 상황이 된 것 같군!” 캡틴은 단언하고는 내 방향을 가리켰다.

“상급 비행 장교! 저 스튜어디스를 구금시키게! 정글열 때문에 파라다이스 섬을 떠나고 싶지 않아하는 모양일세!”


이런 명령을 예상치 못한 파일럿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상급 비행 장교” 역할을 맡은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내려 했다.


“파일럿. 저 불복자를 구금시키라니까.” 캡틴은 한숨을 쉬고는 아까보다 엄격한 몸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구금”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에 나는 옆으로 훌쩍 뛰어 돌무더기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파일럿은 나를 쫓아 굴러와서는 내 부츠짝밖에 잡지 못했다. 우리는 발길질하는 부품처럼 울퉁불퉁한 덩어리가 되어 낡고 쓸데없는 것들과 함께 끝없는 쓰레기의 산으로 굴러떨어졌고, 잡동사니를 여기저기로 더 흩어놓고 말았다.

"더 열심히 해 보게에에..." 캡틴이 위쪽에서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쓰레기 산사태가 달그락거리던 소리가 귀가 멀어버릴 듯한 굉음이 되어 몰아쳐오기 직전까지는.












Issue 4d

ENTRY 122__23 - 인간 대상 찰스 스니피 - PERSONAL ID 04477645.

...



할 얘기가 있다. 이번에 고물을 모아서 간신히 썰매를 한 대 만들었다. 즉 이제는 척추를 두동강낼 기세인 거대한 등짐을 걸머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쪽은 아마 파일럿이나 캡틴이 짐 운반에 아주 조금은 도움을 줄 거라고 짐작하겠지만, 전혀. 캡틴은 “그런 품위없기 짝이 없는” 짓은 싫어한다느니 “이건 자네 직분이잖나?” 운운하며 조금이라도 무거운 것은 들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파일럿은 내가 부탁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나는 “전 우주의 지배자”이신 캡틴이 아니지 않냐면서.


캡틴은 “지상 최고로 신묘한 즐겁고-미끄러운-공학기술 의 귀재” 라고 나를 칭찬하고는, 내게 “이 달의 사원”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물론 그 칭호로 얻은 것이라고는 파일럿의 원한밖에 없었다.


파일럿이 자꾸 썰매를 빼돌리려 한다. 내 업적을 박살낼 의지로 충만해 있는 것 같다. 그게 아니면 높은 쓰레기더미에서 눈썰매 놀이라도 할 심산인 모양이다.

파일럿과의 “진지한 대화”에 도전했다가 장렬히 실패한 뒤, 나는 썰매에 소 방울을 매달았다. 이제 그 녀석이 썰매를 옮기려고 할 때마다 딸랑거리는 소리가 나겠지.

불행하게도 나는 오래지 않아 그 방울소리에 넌더리를 내게 되었다.

뒤늦게 방울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방울소리가 제대로 마음에 든 기색인 캡틴은 내가 잠든 사이 썰매에 방울을 두 개나 달아 놓았다.

내가 애를 쓰건 말건간에, 날이 지날수록 썰매에 매인 방울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졌다.

아예 방울을 싹 잘라내서 깊디깊은 크레바스에 던져넣기도 했다. 태워버리기도 했다. 부수기도 했다.

소용없었다. 내가 벌이는 갖가지 파괴공작이 지나가고 나면 방울의 개수는 늘어만 간다.


대체 저 작자들은 이 망할 방울을 어디에서 다 조달해 오는 거야?

파일럿이 자주 어디론가 사라지는 걸 보면 아마 폐허에서 방울을 찾아헤매느라 시간을 죽이는 모양이다. 아니면 또 캡틴에게 바친답시고 괴상한 성상(聖像)을 만들고 있을 수도 있고.


결국 나는 방울 전쟁을 그냥 포기했고 그와 거의 동시에 캡틴도 썰매에 방울을 더 매다는 일을 그만두었다. 어쩌면 캡틴은 그저 날 골탕먹이기 위해 이 모든 짓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더 달아 놓을 방울이 떨어져서 제풀에 그만둔 것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썰매에 방울을 더 매달래야 매달 자리가 없어서거나.


어느 날 아침에 방독면 끝에 빨간 칠을 당하고 플라스틱 뿔을 강력접착제로 머리에 단 채 깨어나는 일만은 없기를 진심으로 빌고 있다. 하, 지금 내가 누굴 두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보나마나 머잖아 일어나고 말 것이다. 캡틴이 벌써부터 나를 “심술쟁이 순록 루돌프” 라고 부르고 있는 걸 보면.



내가 썰매를 끄는 나날 동안 캡틴은 크리스마스 캐롤을 모욕하는 일에 취미를 붙였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지 캡틴의 버터 조심


버터 조심

버터 없음

버터 없는 감자라

내가 말했다네

캐앱틴이 안 줄거라네


지 캡틴은 다 알고 있다네"


파일럿의 추임새도 함께였다.

"스니피는 바보라서 신발 안에 석탄이"


신발 속에 든 석탄 조각을 털어내느라 정신이 산란해진 나는, 캡틴과 파일럿이 부서진 작은 가정집의 지붕으로 기어올라가선 우리의 보존식품이 든 가방들을 굴뚝으로 털어넣으려 하는 행각을 뒤늦게야 눈치챘다.


"거기 두 바보 형씨들?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내가 저편으로 소리치자 캡틴이 대답했다. "어리고 착한 소년소녀들을 생각해 보게!"


"그래, 스니피. 넌 애들의 요구에 너무 무심하다니까!" 호들갑스럽게 팔을 휘두르며 말한 파일럿은 얼음이 낀 지붕에서 거의 굴러떨어질 뻔했다.


"뭐라는 거야? 애들? 당장 그 짓 멈추라고!" 나는 벌컥 소리쳤다.


“자네 명랑함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는 있는 겐가?” 캡틴은 굴뚝에 들어가기엔 너무 큰 트리 가방을 구겨넣으며 물었다.


“내 말이! 캡틴마스(CAPTAINMAS) 축하하는 게 얼마나 신나는데! 싫음 말고!” 과하게 발랄한 동작으로 주먹을 휘두른 파일럿은 이번에는 균형을 잃고 말았고 결국 지붕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쌓인 눈에 추락해 버렸다.


눈더미에 파묻힌 파일럿이 기운차게 다리를 버둥거리는 모습을 확인한 나는, 한숨을 푹 내쉰 뒤 벽난로에 처박혔을 가방을 주우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서는 퍽 괴기스러운 광경이 나를 반겨 주었다. 백골 가족이 푹 패인 소파에 둘러앉아 그 한가운데에 놓인 그을린 나뭇가지를 바라보고 있다. 미묘하게 크리스마스 트리와 비슷하게 생긴 나무는 은박지를 오려 만든 별으로 뒤덮였고 꼭대기에는 천사 날개를 단 캡틴의 그림이 달려 있었다.




역주. 파일럿이 부르는 노래는 <산타 할아버지 우리 마을에 오시네(Santa Claus Is Coming To Town)>.










Issue 5

ENTRY 125__44 - 인간 대상 찰스 스니피 - 개인 ID 04477645.


“일어나게! 이 버터빵 같으니!” 캡틴이 썰매에 덕테이프로 붙여놓은 나팔로 끝없이 경적 소리를 냈다.

“썰매 익스프레스가 목적지에 도착했네! 하차할 때는 조심하고 소지품을 두고 내리지 말게나. 주인 없는 소지품은 굶주린 폭탄제거반에게 아침식사로 제공될 걸세!”


캡틴의 으름장이 끝나기가 무섭게, 파일럿의 몸뚱이가 모래 위에 풀썩 쓰러졌다.


‘멋진데. 정말 멋져.’ 나는 생각했다. ‘썰매 위에서 좀 깜박 잠들었다고 이런 결과가 나오는군. 우리가 지금 대관절 어디 있고 파일럿이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를 끌었는지는 신만이 알겠지.’나는 썰매가 마른 바다의 바닥을 멀리 가로지르며 만든 들쭉날쭉한 자국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굵직한 로프를 어깨에 휘감은 채 엎어져 있는 파일럿을 쳐다봤다.


썰매에서 내린 캡틴은 남는 신발짝으로 파일럿을 쿡쿡 찔렀다.


"우리 운전수에게 기술적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 수동 상륙 프로토콜 가동!"


그렇게 말하며 캡틴은 썰매의 모서리를 붙잡고는 썰매를 통째로 엎어 버렸다. 아직 잠이 덜 깬데다 이런 상황을 대비치 못했던 나는 속절없이 모서리를 붙들려 했고 결국 썰매와 함께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배낭과 옷가지가 내 위로 우르르 쏟아졌다.


물건에서 모래를 털어내며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하려 애써 보았다.

등 뒤에는 텅 빈 사막이 가득이었다. 눈앞에는 허옇게 짙은 안개가 있었다. 그리고 파일럿을 썰매의 멍에에서 끌어내는 캡틴도.


바다가 말라붙어 만들어진 불모지를 덮었던 안개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나는 우리 일행이 마른 해저를 아무렇게나 배회한 끝에 커다란 난파선과 맞닥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함이었다.


전함이 우리 앞에 기념비처럼 우뚝 서 있었다. 이 전함과 우리 사이에 몇 세기가 가로놓였을까. 녹슨 철제 자재가 모래 위에 널브러졌고 개중에는 바닥에 똑바로 박혀 고대의 오벨리스크처럼 사막을 굽어보는 것도 있었다. 전함에 여기저기 뚫린 거대한 구멍으로는 희미한 빛살이 비집고 들어왔다. 일출이었다.


배의 부서진 갈비뼈를 가로지른 우리는 반대편에서 퍽 특별한 광경을 발견했다. 어떤 무리가 이 배를 거진 분해하다시피 해서 그 쇳더미로 고철 마을을 지었었던 모양이었다. 마을은 오래 전 버려진 채였다. 마을을 두른 철망이 바람을 맞아 웅웅거렸고, 작은 새의 뼛조각이 부츠 아래 밟혔다. 곳곳마다 드리워진 끈에 매달린 쇳조각들이 으스스한 멜로디를 연주했다.


녹슬어빠진 고철 조형물들 사이의 길바닥에서 캡틴과 파일럿은 <타이타닉>이 든 옛적의 CD 같은 것을 주웠다. 파일럿은 그 CD를 “높은 곳에서 내려온 계시” 라고 단정하고는 배의 이름을 “캡타닉”으로 지었다. 그러자 캡틴은 내게 “매력적이기 그지없는 배역” 이라며 “왼쪽 양말짝을 찾다가 비극적으로 익사하는 사환” 역을 맡으라고 했다. 내 왼쪽 양말을 벗기려고 3번이나 시도한 파일럿은 내게 2번의 뇌진탕과 욱신거리는 어깨 한 쪽을 남겨주었다. 하지만 나는 파일럿의 억센 손아귀에서 간신히 양말을 지켜냈다. 파일럿은 평소처럼 이번 실랑이에서도 이길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간밤에 나와 캡틴을 실은 썰매를 끌고 사막을 횡단하지만 않았었다면 말이다.


 저 넘치는 힘이 어디서 저렇게 솟아나는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사람 둘에 짐짝까지 가득 실은 녹슨 썰매를 밤새도록 끌었다면 나는 땀과 먼지로 된 반죽이 되어 녹아버렸을 것이다. 남의 양말을 벗기는 데 성공하기 일보 직전까지 날뛸 수는 없었을 거라고.


날 놀리는 일을 그만둔 캡틴은 파일럿을 낚아채서는 녹슨 계단을 딛고 전함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키네토스코프적 형성물 캡타닉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을 재연출” 하기 위해서라나. “섹시한 치아-덩어리들에게 어필하세나, 골든 오스카 상은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는 물건이 아니니 말일세.” 라나.














Issue 5d

ENTRY 126__12 - 인간 대상 찰스 스니피 - 개인 ID 04477645.


나는 까마득한 위쪽 어딘가에서 배의 녹슨 구멍들 사이로 메아리치는 캡틴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이 쉐상의 지둬자다! 미사일을 발풔하라!"


파일럿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내 긴 머리칼을 휘날리는 바람이 생생히 느껴져요!"


"경이로운 느낌이 간(肝)을 가득 채우고 있어!"


파일럿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캡틴이 여기 있으니 난 두려울 게 없어요 WHEN ZEE CAPTAIN IS NEAR, THERE IS NOTHING TO FEAR,

내 간(LIVER)이 끊임없이 그대를 향하겠죠 AND I KNOW THAT MY LIVER WILL GO ON AND ON,

우리 영원히 이렇게 변함없이 살아갈 거예요 I KNOW THAT WE'LL STAY FOREVER THIS WAY,

그대는 내 간 속에 살아있고 YOU ARE SAFE IN MY LIVER

내 간은 끊임없이 그대를 향할 거예요 AND MY LIVER WILL GO ON AND ON


나는 결론내렸다. 와, 저 둘은 완전히 맛이 갔군.


캡틴과 파일럿이 전함 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동안 나는 혹시 있을지 모를 보급품을 찾아 고철 마을을 뒤적였다. 웬만한 물건은 가져다 쓰기에는 너무 녹슬었거나 너무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밀폐된 수출용 컨테이너 세 채를 찾아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 크로우바를 쑤셔넣은 끝에 나는 거칠게 첫 번째 컨테이너의 문을 열어젖혔고, 타이즈의 바다를 맞닥뜨렸다. 타이즈 더미가 컨테이너 밖, 즉 내 정면으로 쏟아져나오는 바람에 나는 거의 으스러질 뻔했다. 유사 이래로 타이즈 산사태한테 살해당한 사람이 존재할지 궁금해지는데. 맹렬히 허우적거려 타이즈의 홍수에서 빠져나오던 나는 캡틴이 다가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지금 어떤 놀라운 보물을 찾아낸 건가? 보고하게!” 명하는 캡틴의 부츠가 바닥과 부딪히며 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수백 수천 짝은 되는 오래된 우중충한 색 스타킹요.” 타이즈 더미 속에서 헤엄치며 대꾸했다.


“좋아! 패션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스카프로 쓸 수 있겠군!”


“저희한테 닥칠 비상사태 중에 제일 확률이 높은 걸 따지자면 눈보라죠. 이건 땔감으로 좋겠네요.” 


“과연 그렇군, 요즘 날씨는 꼭 변덕스러운 아가씨 같으니 말이지!” 타이즈 한 켤레를 주워 목에 두르려 부스럭거리며 캡틴이 주절거렸다.


다음 컨테이너에서 쏟아져나온 것은 일곱 가지 색이 아무렇게나 뒤섞인 루빅스 큐브였다. 나는 이번엔 잽싸게 물결을 피해 도망쳤고 덕분에 큐브 더미는 내가 아닌 파일럿의 발치를 덮쳤다. “이 더러운 큐브 녀석들, 복수할 거야!” 파일럿이 바닥을 뒹굴며 외치는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 나는 큐브 중 하나를 집어들어 재킷 안에 갈무리해 두었다. 정말로 심심해질 일이 생기면 갖고 놀까 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큐브의 면은 6개인데 누가 이 7색짜리 큐브를 풀 수 있겠어? 어쩌면 이 물건은 풀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어떤 끔찍한 비유를 전하기 위한 작품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이걸 억지로 만들던 공장 노동자들이 도움이나 폭동을 빌던 소리 없는 외침이거나.


뭐든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는 물건이 들어 있기를 간절히 빌며 나는 세 번째 컨테이너를 열었다. 컨테이너에 들어 있던 것은 “전자레인지 하나로 마스터 셰프 되기” 라는 제목이 쓰인 수천 권의 책이었다. 


캡틴은 그 중 한 권을 집어들어서는 나에게 건네었다.


“스니피! 이것은 숙명의 부름일세! 자네는 위대한  일을 하도록 운명지어진 거야! 자네의 과업은 캡타니아의 공영을 위해 이 신성한 전자레인지를 찾아내는 일일세! 그리고 적절하고도 세련된 음식 정련법을 키네토스코픽 방송으로 만백성에게 널리 알리게!”


"싫다면 어쩔 건데요!" 나는 요리책을 밀어내 버렸다.


"이 전능한 힘으로 자네가 거느릴 튜브 구독자를 상상해 보게!" 캡틴은 내 코앞에 책을 흔들어댔다.


"됐다니까요, 됐어 그러다가 과하게 유명해져 버리면 어떡합니까?" 나는 농조로 받아쳤다. "책임이 너무 무겁다고요."


캡틴은 책을 빙빙 돌리더니 별안간 파일럿의 머리를 향해 집어던졌다. 파일럿은 움찔하지도 않고 책을 덥석 받아냈다.


“훌륭하기 짝이 없는 답변 시간!” 캡틴은 만족스럽게 외쳤다.  "파일럿 자네는 좋은 임시 쉐프가  될 걸세, 스니피가 유명인되기-공포증을 극복하는 동안 말이야."


“옛썰” 파일럿이 화음처럼 답했다. “제일 최고의 전자레인지의 기사가 되겠슴다! 게만도 못한 스니피처럼 실망시켜 드리는 일은 없을 검다! 저는 전자레인지 괴수를 타고 아무도 가 본 적 없는 개척지로 나아가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저편으로 걸어갔다. 전자레인지에 올라탄 캡틴, 드래곤과 싸우는 캡틴, 스니피를 골탕먹이는 캡틴 등등에 대한 찬양으로 점철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이어지고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가운데.


내 일행들은 우스꽝스럽고, 형용할 말도 없을 만큼 제멋대로고, 놀랍도록 짜증나는 인물들이다. 그것만큼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내 전부다.





역주. 파일럿이 부르는 곡은 타이타닉의 OST인 <My Heart Will G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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