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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ry 9997 by 스니피

 


Entry 9997:

 

 이 메모리 카드를 찾고 메시지를 읽을 누군가에게…

 

 내 이름은 찰스 스니피다. 아마 내가 이 지구 위에 유일하게 남은 제정신인 사람일 것이다. 그쪽이 이 메시지를 이해할지 모르겠다. 그쪽이 이 데이터 카드에 새겨진 0과 1들을 해독하기는 할 수 있을지, 미세장치들이 오래 갈지, 이걸 구성하는 플라스틱과 철조각들이 세월에 쓸려 먼지가 되는 건 아닐지, 이걸 감싼 티타늄 외장이 제자리에 있을지 아니면 변화무쌍한 풍경의 일부가 되어 영영 사라질지도, 전혀.

 하지만 나는 아직 훗날의 누군가가 나에 대한, 긴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낼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쪽이 뭔가 쓸만한 걸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만약 그쪽이 아직 인간이라면 이건 그쪽의 조상이 탐욕과 오만으로 문명을 무너뜨렸던 일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만약 그쪽이 아예 다른 종족이라면, 이건 진화의 긴 과정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줬던 생태계의 균형을 무시한 우리 인간이 어떻게 멸종해 갔는지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수 년 동안 나는 주식회사 GOOD Directorate의 사원으로 근무했다.

 Directorate 사는 독점권들을 긁어모아서는 고용한 변호사들의 더러운 손이 닿는 곳 전부, 프로그램부터 발명, 의약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분야에서 저작권을 행사했다. 사람의 아주 기본적인 권리와 개념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저작권법에서 정한 기한은 처음엔 이십 년으로 늘어났고, 다음엔 백 년, 그리고 나중에는 영구적 권한으로 바뀌었다.

  Directorate가 수면행위의 저작권을 가지게 된 뒤부터는 그들을 막을 사람은 없었다. 문제는 Directorate가 ANNET이라는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 때부터 시작되었다. ANNET은 사람의 정신과 인터넷을 연결하는 뇌신경 네트워크다. ANNET은 사람들이 항상 인터넷을 볼 수 있고, 눈을 깜빡이거나 사고하는 것만으로도 제품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잠을 자는 동안 게임을 하거나 영화까지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삼십억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언제나 넷과 연결되어 있다는 게 상상이 가는가?

 사람들은 정보가 세상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보들이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발행되자, 가장 중요한 정보들은 간단히 검열되거나 방대한 대중문화의 쓰레기같은 정보들 사이로 묻혀 사라졌다.

 ANNET에 접속하기 위한 신경 접속장치는 초기에는 파란 머리띠였지만 기술의 발전과 함께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종국에는 Directorate에서 같은 파장의 전파로 넷을 발신해 사람들의 사고를 구성하게 되면서 장치는 거의 필요없게 되었다. 나는 설계자나 프로그래머가 아니다 보니 이 이야기에서 기술적인 측면은 조금 왜곡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부터 내 기억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나는 신경 네트워크 접속장치로 ANNET에 접속할 수 없는 소수의 희귀체질 생존자 중 하나였다. 덕분에 사고만으로 네트워크를 살필 수도 없고 잠도 거의 잘 수 없는 나는 장래성이라고는 없는 말단 직책에 남겨지게 되었다. 머리띠는 나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었고 신경 송신탑은 만성적인 두통을 불러왔다.

 내가 눈을 감을 때마다 네트워크는 내 정신에 접속하려 들었다. 나는 끔찍한 악몽과 더불어 진절머리나고 현실감을 앗아가는 미래의 풍경들을 보았다. 수 개월 간의 고문 같은 직장 생활 속에서, Directorate는 나를 사무실에 앉혀 두고 "실험 대상들"에 대한 서류를 분류하게 하다가, 나중에는 나를 '데드 존 관광'부서로 전근시켰다. 그쪽은 Directorate의 치솟은 큐브들과도 송신탑을 품은 도시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수 세기에 걸친 산업 오염은 돌이킬 수 없이 이 세상의 생태계를 바꾸었다. Directorate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상황을 바꾸려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이익은 커져야 하고 제품 생산량은 늘어나야 하고 고객들은 만족해야 하니까. 오존층의 구멍, 돌이킬 수 없는 환경 변화, 방사성 낙진, 야생 돌연변이, 점점 어두워지는 낮과 까맣게 변하는 하늘… 그들은 이 앞에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

 

 

Entry: 381:

 

 내가 G 단지를 벗어나기 한 달 전부터 아무리 봐도 정신이 나간 듯한 서류 몇 개가 내 책상에 올라왔기에, 나는 이러다가 나도 덩달아 완전히 맛이 갈 듯 싶어 급히 전근을 준비했다.
  그 중 "프로젝트 7호" 라 불리는 서류는 머리깨나 쓴다는 엔지니어 그로모프 박사의 작품이었다.
  그로모프 박사는 ANNET의 검색엔진을 이용해 지구에서 가장 운좋은 남자를 찾아낼 요량으로, total grid라 불리는 무언가로 삼십억 명의 기억을 하나하나 스캔했다.
초반부에서 그로모프의 글은 흠잡을 곳이 없었고 내용에도 일관성이 있었다. 이론은 통계가 세계를 좌우하며, 모든 통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고, 종(種)으로서의 인류가 멸망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도 확실히 알 수 있으리라는 발상이었다.
  그로모프 박사는 통계학적 자료의 허점과, 유사 이래로 이루어져 온 인간 상호작용의 연결과, 조작 도구로써 쓰일 수 있는 어떤 것, 그리고 조작 장치... 아니 그걸 정말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박사의 말로는 우주를 균형있게 만드는 궁극적인 장치에 주목했다.
  그리고 보고서는 이하와 같은 병신탈춤을 추기 시작했다.
  가) 시간축 밖에 존재하는 초월자를 찾는다.
  나) 그리드가 온 행성에 걸쳐있는 초월적 심상의 신경계처럼 불안정해지고 예측불가능해지며, 시스템의 사용자들은 자기인식이 가능한 개체로서 시스템의 신경 세포가 된다.
  끝나지 않는 실험의 연속 가운데, 감독은 개차반이고(프로젝트를 밀어붙인 그로모프 박사에게 감사를), 서류기록은 엉망진창인(Directorate의 진저리쳐지는 관료제에게 감사를) 이 실험은 실험 환경의 안전 기준 따위는 말아먹었고, 보고는 윗선에 제대로 올라가는 법이 없었으며, 정확히 무슨 일이 굴러가고 있는지는 설명조차 불가능했다.
  그 이후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서 나는 그로모프 박사를 탓했다.

 

~

 

 

DIRECTORATE REPORT:


  저는 이 문서를 통해 Directorate사의 주요 주주이자 ANNET 데이터베이스의 관리자를 맡은 수석 엔지니어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슈퍼 히어로" 나 "자아가 있는 검색엔진" 등 허황한 믿음에 빠져 있어 현재의 자리에 부적절한 인물임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그로모프 박사가 본인의 이메일에서 애정을 담아 "마이 걸 애니" 운운 호칭하는 ANNET은 그저 뇌신경 인터페이스이며 검색 데이터베이스일 뿐, "살아있으며 생각하는 독립체"가 아닙니다.
  실험체 7호는 "예정된 종말에서 세계를 구할 슈퍼 히어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처럼 복잡한 기계를 사탕마냥 쥐어 줬다가는 머잖아 무엇이 되더라도 고장을 내고 말 실수투성이 저능아일 뿐입니다. 7호의 IQ를 검사해 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왜 굳이 그 실험대상에게 '캡틴'의 지위를 주고 3등급 시설 전부를 포함한 데이터뱅크에 접근할 권리를 쥐어 주신 겁니까? 그것이 꼭 필요한 일인지요?
  한 번이라도 카메라 영상을 보았다면 왜 다들 캡틴이 정밀기계 부근에서 뜨거운 차를 들고 돌아다니도록 놔두는 겁니까?
  부디 제가 "데드 존 관광 산업" 부서로 전근하기 전에 이 문서가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저로서는 여기 붙어서 제 책상에 올라온 그로모프 박사의 "중력 정지"나 "우주 혼란", "시간 휘기" 같은 정신나간 실험들에 대한 쓰레기를 읽는 일을 도무지 버틸 수 없으니 말입니다.

 

 진심을 담아,
 찰스 스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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