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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기억하는 날  by 스니피



10월 어쩌고저쩌고 :


오늘은 "과거를 기억하는 날" 이라고 캡틴이 선언했다.


오늘의 일과는 부서진 노트북이 내게 박치기하며 "메일이 도착했습니다!"를 외치는 걸로 시작되었다.

 나는 캡틴에게 노트북이 아침에 사람을 습격한 역사는 없다고 항의하려고 했다. 여기에 캡틴은 노트북들은 사실 예전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메일 중독에 시달렸던 주인들은 아침마다 눈만 뜨면 노트북에 자진해서 머리를 박고 그날의 메일을 읽는 데 푹 빠지기 일쑤였다고.


 그리고 내 머리는 "스팸 메일 경고! 필터를 사용해서 스팸 메일을 걸러내세요!" 라는 말과 함께 텅 빈 철제 스팸 깡통의 세례를 받았다.

그런 말과 함께 캡틴은 낡은 테니스 라켓 두 개를 내게 건넸다. 테니스 라켓에 붙은 노란 덕테이프에는 "삭제" 와 "메일 주소 차단"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스팸의 공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고, 파일럿의 오늘 임무는 건물 폐허에 숨어서 나한테 불시의 간격으로 스팸 깡통을 던지며 "생식기 크기를 키워보세요!", "당신을 사랑하는 러시아 신부", "나이지리아 왕자가 560억 달러를 당신에게 제공합니다" 같은 말을 외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캡틴은 지저분하고 파란 창틀을 내게 주면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37.0" 이라고 했다. 그리고 옥션에서 음식물을 구해올 것을 명했다.

 어제 보급품을 찾아냈던 낡은 쇼핑몰에는 대량의 스프레이로 "옥션"이라는 글자가 칠해져 있었다. 난 캡틴과 파일럿이 어떻게 이런 완전히 정신 나간 파괴행위 예술품을 만들어놨는지 도통 짐작도 가지 않았다. 캡틴이 파일럿을 태우고 파일럿이 스프레이로 글자들을 썼을 거라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쇼핑몰의 문을 열자마자 난 바닥으로 바로 떨어져내렸다. 망할 두더지가 낡은 바닥을 먹어치우기라도 했나 싶었다... 하지만 마침 그 때 캡틴이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충돌했네"라고 덧붙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이 곳의 바닥이 어떤 방식으로든 고의적으로 부서졌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아마 인터넷 익스플로러 충돌처럼 함정이 더 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닿은 나는 더 조심해서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팝업창!" 캡틴의 목소리가 위쪽에서 울려퍼지며 종이상자가 비오듯 쏟아졌다. "XXX 걸즈" 라고 쓰인 상자가 머리를 정통으로 맞췄다.

 

 나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파일럿은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라고 써진 초록빛 곰팡이가 핀 창틀을 덮어쓰고 내 주위를 도사렸다.

 "덮어쓰기 당해라!" 파일럿의 팔이 내 얼굴 앞뒤로 정신나간 춤처럼 휘둘러졌다.


 "브라우저 전쟁이다!" 캡틴이 위쪽에서 선포했다. "누구든 지하 2층에 먼저 도달하는 자만이 셧다운을 면할 걸세."

 썩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파이어폭스 역은 포토샵이 하게 될 걸세" 캡틴의 목소리는 계속됐다.

 "지하 2층에 남을 브라우저는 파이어폭스와 사생결단을 치르게 될 걸세. 아마 십중팔구 300개나 되는 송곳니에 찢겨 죽겠지."

 몸에 빨간 선이 그어진 지렁이 같은 괴물이 구멍 너머 아래로 느릿하게 고개를 내미는 게 보였다. 배고픈 짐승은 건물 전체가 울릴 듯한 날카로운 소음을 냈다. 이런 상황이면 동료들이 곧 몰려오겠지.

 라이플 끈에 손을 가져가자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죽이는데, 내가 잘 때 그 인간들이 빼돌렸군.

 파일럿은 모퉁이에서 날 보고, 다음으로 빨간 줄이 그어진 괴물을 보더니, 문으로 펄쩍 뛰어갔다.

 난 속도를 내서 따라갔다.

 파일럿은 또 스팸 깡통을 나한테 던졌고 난 가까스로 피해냈다.

 넷스케이프, 그러니까 파일럿은... 벌써 계단을 반이나 올라간 채였다.

 갑자기, 위쪽에서 무수히 많은 텅 빈 스팸 캔 부대가 무서울 정도로 덜컹거리는 소음을 내며 계단 아래로 쏟아져내렸다.

 파일럿은 자기 등에 매고 있던 두 개의 라켓을 꺼내서 캔을 쳐냈다. 

 처음 들어왔던 곳에 라켓을 두고 온 나에겐 그런 방어 수단은 없었고 덕분에 캔은 내 머리로 비오듯 쏟아져 내 걸음을 멈추고 날 쓰러뜨렸다.

 파이어폭스가 옆에서 날카로운 소리를 내고 노래하는 소리가 마치 나더러 빨리 도망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꼭 미친 비둘기가 확성기에 대고 우는 소리처럼 들렸다.

 파일럿은 몇 걸음을 딛고 뛰어올랐다. 보아하니 군대에 있던 시절에 체조든 뭐든 제대로 한 적이 있었을 듯 싶다. 빌어먹을 내 사무직 생활 같으니라고.

 내가 문에 막 도착하자마자, 캡틴이 앞에서 자유로 가는 길을 막으며 나타났다.

 철문이 내 코앞에서 닫히며 철문이 밀어낸 커다란 칠판이 내 방독면을 덮쳤다. 칠판에는 "S O P A" 라는 4글자가 끄적여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 이 항목은 미국 정부가 검열함" 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늘 세계가 멸망한 듯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절망적으로 칠판을 긁었다. 2012년의 네티즌들이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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