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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  by 스니피



ENTRY 3647:

 11월 어쩌고저쩌고.
 아무래도 날짜를 가늠할 새로운 방도를 생각해야 할 듯 싶다. 신발바닥에 숫자를 새긴다거나? 아니. 이건 좀 파일럿 같은 짓인 것 같다.

 나는 2012년자 달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 날짜가 금년이랑 맞지 않을 것도 뻔할뿐더러, 내가 잠깐 방심해서 달력을 손에서 놓은 틈을 타 캡틴은 끝도 없이 낙서를 해댄다. 신기하게도 이 달력은 딱히 상하지도 않았다. 2012년자 달력이 그 긴 시간 동안 이렇게나 잘 보존되었다는 건 제법 인상적인 일이다. 이 달력을 플라스틱 보관함에 넣고 "마야인들은 틀렸어, 아무도 믿지 말라고!" 같은 말을 적어 봉인해 놓았던 사람에게 이건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물건이었겠지.

 내가 몇 살인지 가늠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항상 달력에 표시를 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아니면 캡틴이 내 표시를 지워서 날 골탕먹이고 있는 것이거나.
아무래도 캡틴에게 내 생일에 대해 절대 말하지 말아야 할 듯 싶다. 괴상한 축하와 더불어 방사능 케이크가 얼굴에 던져질 게 뻔하니까. 저번에 맞은 방사능 케이크를 지우는 데는 거의 평생이 걸릴 뻔했다.

 어느 날 보니 달력 위에 무언가가 온통 쓰여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까만 펜으로 쓴 글자로 매일매일이 웃기지도 않는 기념일로 지정되어 있었다.
 빨간 글씨로 캡티니아의 공휴일을 정해 놓은 낙서도 있다.
 오늘은 "나는 날" 이란다.
 어제는 "과거를 기억하는 날" 이었고.
 확실히 누가 봐도 기억에 남을 만했지.

 어쨌든 오늘치 날짜 아래에 쓰여 있는 작은 글씨는 "오늘 캡티니아의 신민들은 캡틴의 인구 조사를 달성하기 위해 비행을 시도하여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캡틴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 내가 방방 뛰어다니면서 팔을 펄럭거리는 것? 아니면 나를 의자에서 밀어 떨어뜨리는 것? 설마하니 그 파일럿에게 진짜 사람을 날게 할 만한 기술이 있다고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내가 바보였지!


 파일럿은 정말로 "비행 장치 제작 임무"에 대한 돌파구를 찾아낸 모양이었다.


 그 돌파구는 플라스틱 간이 의자에 거대한 풍선 더미를 묶는 형태로 실현되었다.


 대체 그 많은 빨간 풍선을 어디서 구한 거야? 나로서는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뭐,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주변에 저런 미친놈을 위해 문을 활짝 열어 둔 풍선 공장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 정줄 놓은 비행장치는 근방 해변에서 발견되어 캡틴을 열렬히 만족하게 만들었다.
 파일럿은 재빨리 자리를 뜬 모양이었지만 의자에는 "사용설명서"가 딸려 있었고 캡틴은 나를 "해결책의 일부" 로 "지명"했다. 

 나는 해결책의 일부가 되기를 거절하려 노력했지만 캡틴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실험을 제 시간에 진행해야 하네"라느니, "이 임무는 전 우주에 있어 무한히 중요한 일일세" 라느니, "관객이 보고 있는데 연극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일세" 운운, "불복과 거절은 용납될 수 없네" 등등.

 그리고는 캡틴은 정체불명의 끓는 물체가 가득 찬 컵으로 나를 위협했다.

 엿 같은 파일럿. 대체 어디에 박혀 있는 거야? 이거 사실 네가 날 죽여 없애려는 계획인 거 아냐? 빌어먹을 비행 간이의자같은 건 당연히 그걸 직접 만든 네가 제일 먼저 테스트해 봐야 할 거 아냐. 

 캡틴은 이어 "심리전"으로 날 협박했다. 더불어 내가 "비행장치를 테스트" 하는 데 동의할 때까지 쉬지도 않고 "왱알앵알 왱알앵알" 같은 신경 긁는 소리를 냈다.
 나는 우선 캡틴을 속인 다음 의자를 묶은 케이블이 풀어지자마자 최대한 빨리 의자에서 뛰어내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한 번 자리에 앉자, 벗어날 수 없었다. 캡틴이 의자에 초강력 접착제를 발라 놓은 듯했다.

 땅이 점점 멀어지는 동안 나는 왜 내가 이 미친 짓거리에 어울리고 있는지 고민했다.
 물론 혼자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은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두운 과거의 수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왈츠를 추기 시작하는 탓에 나는 오랫동안 혼자 있지 못한다. 이게 내가 캡틴의 놀음의 희생양으로 계속 남아 있는 이유일까? 과거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이 위편에서는 모든 것이 작아 보인다…
 근심도 날아가 버리고… 

 내가 뭘 걱정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의자에서 떨어질 염려는 없다. 허공에 뜬 채 조용히 미끄러져갈 뿐이다.
 
설마 하늘에 포토샵 같은 게 하나 더 있진 않겠지? 그렇겠지?


 …솔직히 퍽 평화롭다. 캡틴이 왱알거리는 소음으로 괴롭히지도 않고. 이대로 훨훨 날아가서, 이 도시를 벗어나, 정신이 제대로 붙은 생존자들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요…
 평화…
 햇살을 부서뜨리며 흩날리는 눈발…
 아름답다… 

 잠깐 잠깐 물 속에 저건 뭐야? 움직이는 까만 그림자? 거대 물고기?
 그럴 리가 없는데… 기업이 독성폐기물을 수 년간 버려 댔던 곳이다. 대부분의 대형어류가 멸종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읽은 기억이 있다.

 저게 뭐야? 헐? 고래? 아님 메갈로돈?!?!


 아 진짜 아 미치겠네 아 아아아아아…

(전송 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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