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05

|








COMMENT






"빌어먹을 머그!"

나는 증오에 찬 눈으로 머그를 쏘아보았다.

"이건 다 네 탓이야!"


나는 머그를 '심판자' 에게 집어던지려, 혹은 깨트리려, 하다못해 내 몸에서 떼놓으려 했다.

그 비슷한 짓도 전혀 할 수 없었다.


나는 손을 위아래로 털었다. 머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슨 기를 쓰고 노력해도 소용없었다. 머그는 정전기 비슷한 것으로 내 몸에 딱 달라붙은 것만 같았다. 손 위에서 굴릴 수도 있고 심지어 한 손에서 다른 손에 바꿔 쥘 수도 있었지만, 내가 철로 만들어진 물건이고 머그컵은 기름칠한 자석이라도 되는 양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왜 떼낼 수가 없는 거야?!

심판자가 내 몸을 재조립하다가 무슨 짓을 했나?


머그컵을 떨어내는 일을 포기한 나는 심판자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차분히, 명확하게 내 입장을 표명했다. 내 DNA가 머그에 남아 있을 리가 없으며, 나는 캡틴이랑 털끝만치도 닮지 않았고, 증거 같은 걸 확인하고 싶다면 내 기억을 뒤져 보라고.


"증거는 엄존합니다! 우리가 스캔한 결과 당신의 척추에 부착된 보관함에 두 번째 안면이 존재하는 것을 확인했으니까요!"

심판자는 쩌렁쩌렁하게 말했다. 우리가 서 있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의 내부가 그 목소리를 따라 뒤틀렸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크리스털로 만든 거대한 허파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지금 저쪽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아...

배낭 말하는 거군. 아직 메고 있었지. 그래.

나는 배낭끈을 풀고 조심스럽게 지퍼를 열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냐.

아냐.

아냐. 이게 아냐. 이건 아냐!

인형마냥 웃는 캡틴의 얼굴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짓궂은 비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내 손에 쥐어진 채로.

도무지 말이 안 되잖아! 캡틴 방독면이랑 스카프가 왜 내 가방 안에 있는 거야?

이 가방 안에는 깡통, 총알, 붕대, 생필품, 뭐 그런 게 들어 있어야 하는데?

왜?! 뭐지?! 다 어디로 갔지?



내가 캡틴이었나?

사고가 부서져내리며 기억들을 토해냈다. 내 삶의 테이프를 정신적인 삐걱임과 함께 되감아올리며, 영상들이 열을 지어 끔찍한 과거의 구렁텅이에서 기어올라왔다.


난 얼음 위에 서 있는 캡틴을 상상했던 건가?

어떻게 그 살얼음이 캡틴의 무게를 버텼지? 물이 너무 얕아서 캡틴의 부츠가 전혀 젖지 않은 것처럼 보였나?

...그래서 캡틴이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보였던 걸까?


내가 애지중지하던 라이플을 잃어버렸던 때, 난... 캡틴이 내 옆에 있는 시늉을 한 건가?

어떻게 나보다 고작 몇 인치 큰 사람이, 우주선을 먼지구름으로 만들어버리고 날 도로 저편으로 날려버린 핵폭발에 털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수 있지?


그 공중전화가 울렸던 때 난 혼잣말을 하고 있었나? 아니 전화가 울리기는 했나?


그럴 수가. 이건, 이건 아냐.


돌연변이들이 캡틴한테 관심을 둔 적이 있었나? 그 무시무시한 "포토샵"이 우리 미친 사령관을 잡아먹으려 한 적이 있기는 있었던가?

기억해내 보려 했지만 그런 비슷한 일도 없었다.

포토샵은 대개 캡틴을 무시했지. 이 폐허에 있는 다른 괴물들도 전부 그랬어. 그것들은 보통 내 쪽으로 곧장 달려들었다고. 내가 그 맹수들한테 특별히 맛있는 만찬 냄새라도 풍긴 것마냥.


난 잠에서 깰 때마다 내 곁에 서 있는 캡틴을 상상했었나?


내가 파일럿을 부렸던 걸까? 캡틴처럼 차려입고?

파일럿이 존재하기는 했나? 엔지는? 아니, 그 사람들은 존재해야 한다. 이 판국에 모든 사람의 존재까지 의심할 수는 없다.


캡틴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에 대한 자그마한 불가사의들이, 내 이성을 갉아먹으며 숨막히는 혼란의 덩어리로 불어났다.


- - -




내가 데드 존에서 길을 잃고 방사성 폐기물 더미가 된 유레카를 헤매던 때, 내게 더 이상 집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 일행, 내가 인솔하던 과학팀, 관광객들이 전부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변 수천 마일 안에 살아 숨쉬는 존재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가 지치고 굶주려 죽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그 때, 나는 방독면 하나를 찾아서는 내가 캡틴이라고 상상하기 시작한 걸까? 의지할 존재를 얻기 위해서? 나한테 어떤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이든, 무언가를 하라고 말해 줄 사람을 찾아서? 내가 알던 모든 사람이 죽었고 그게 전부 내 탓이라는 끔찍하고 절망적인 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나는 친구를, 나와 이야기할 누군가를, 내가 과거에 어떤 일을 했든 신경도 쓰지 않을 사람을 상상했던 건가?


그 날을 기억해내 보았다. 내가 캡틴을 만났던 날...


내가 결국 모든 희망을 놓아버렸던 날이었다. 데드 존 주행차의 연료가 떨어졌고 나는 가늠할 수도 없는 시간 동안 원을 그리며 걷고 있었다. 뭐든 쓸만한 것, 부서지지 않은 것을 찾기 위해. 혹 잠들어 버릴까 무서워하면서. 작은 소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까, 목소리를 놓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도시는 죽어 버렸다. 그로모프 박사가 우려했던 대로 데드 존이 이겼다.

그로모프 박사가 인류에게 무엇을 했었지?

기계 속에서의 불멸, 인간의 정신은 서버에서 영원토록 보존될 것이며 슬픔도 고통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하지만 Good Directorate를 흔들림 없이 지지하고 제품을 사들이며 생각을 그들에게 맡겼을 경우에 한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지옥처럼 얼어붙은 폐허에서 사망과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너무 늦었다. 나는 전쟁, 혹은 분쟁, 혹은 마지막 저항, 무엇인지도 모를 그것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1%들이 결국 ANNET의 탑을 하나하나 날려버린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긴 건가?

내가, 내가 더 나은 인류를 소원하는 바람에 전쟁이 일어난 건가? 아니면 내 미움 때문에 ANNET의 서버를 파괴했었나? 그들이 나를 인간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우리를 천치라고 불렀던 인간들 때문에?

분명 나는 그 이름을 치떨리게 증오했었다. 나는 그 중오 끝에 결국 돌아버려서 마지막으로 데드 존으로 떠나기 직전에 ANNET의 코어를 파괴했었던 걸까?


나는 거대한 전쟁용 장비가 남긴 흔적이 분명한 커다란 자국에 걸려 넘어졌다. 자국은 몇몇 사무용 건물을 짓밟고 무너뜨리며 이어졌다. 그것과 비슷한 탱크들이 저편에 번들거리는 반사광과 함께 얼어붙어 멈추어 있었다. 기계장치가 핵폭탄의 전자기 펄스로 망가진 채였다.

그렇구나. 깨달음이 찾아왔다. 나에게는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더는 일어날 힘이 없었다. 회색 눈, 허공을 떠도는 재와 뒤섞인 눈이 내 몸뚱이 위를 덮기 시작했다. 잔혹한 냉기가 나를 산 채로 잡아먹어갔다. 나는 지쳐 죽어가고 있었다. 체념하며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가느다랗게 눈이 감겨갔다.

헌칠한 키의 모자 쓴 그림자가 눈보라 사이에서 나타났다.

눈을 깜박였다.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내 방향으로 걸어오면서도 그림자는 발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림자는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쩌렁쩌렁하게 말했다.

"반갑네, 경. 봄이다 보니 날씨가 퍽 사랑스럽군, 그렇지 않은가? 이런, 이 초라한 몰골은 뭔가! 버본 주 좋아하나? 싫다고? 치과 보험 지원에 승진 기회도 많은 완벽한 직장엔 관심 있나?"


난 캡틴을,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때 갑작스레 나를 찾아온 자비로운 천사를 만난 날을 상상해낸 건가?


나는 어디로 나를 이끌지 모르는 미쳐버린 논리의 끈을 붙잡았다.


그 자들이 저주스러운 ANNET을 설치하고 저작권을 주장하면서, 인간성의 마지막 보루 ─ 사고를 손에 넣으면서, 세상은 미쳐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타워들은 무너지고 비활성화되었지만, 내 인지능력은 분명 미세하게 뒤틀린 상태였다. 내가 더 이상 전파 범위 내에 있지 않은 이 순간까지도.


우리가 데드 존의 얼어붙은 바다 위에서 발견한 원인모를 괴수들은, 인간의 사고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의 존재들이었다.

마치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닌 다른 세계, 전쟁으로 인해 열어젖혀져 버린 어느 세계에서 온 것만 같았다. 혹은 심판자가 온 곳처럼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존재일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면 Directorate에서 그치들이 관리하던 현실 왜곡 프로젝트를 통제하지 못해 실수로 만들어진 결과물이거나.

우리는 절대적인 힘, 우리의 우주와 우리의 어설픈 한계보다 더 큰 힘을 갈망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세계를 망가뜨렸다.

우리는 신을 찾거나 만들어내고 싶어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 신은 심지어 나에게 말을 걸기까지 했다. 그걸 우리가 뭐라고 불렀었지? '기형 441', '행운의 신', '사탄의 궁둥이', '검은 별'... 그는 내게 내 모든 바람이 이루어질 거라고 약속했다.

물건이 내게 말을 걸어온 일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부름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나는 말할 리가 없는 것들이 말을 걸어 오는 목소리를 끈기있게 무시해 왔다. 그래, 지금 내 손에 달라붙어 있는 빌어먹을 도자기 하트 머그컵 같은 것 말이다.


'신의 기형아' 는 내 일행을 와해시켰다. 일행을 그 절대적인 힘으로 홀렸고 마치 지구의 역사에서 오래 전 잊혀졌던 '황금광 시대'처럼 서로 분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모두 죽여버릴 수밖에 없었고... 나는 그 아득한 순간에... 나 자신보다 더 큰 어떤 존재가 되려고... 캡틴이 되려고 했나?

...온갖 황당무계한 임무들로 이 폐허의 절망하고 길 잃은 이들을 이끌기 위해서...


- - -



혼란에 빠졌다. 생각 가운데 헤매며. 기억 가운데 헤매며. 나는 누구였지?


"아냐!

내 이름은 찰스 스니피야!

내 이름은 찰스 스니피라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 되뇌었다.


심판자는 형형하게 나를 응시하고, 판단하고, 내가 미친 사람처럼 떨며 캡틴의 방독면을 배낭에 집어넣으려 하는 모습을 감정하고 있었다. 너무 다급하게 구겨넣은 탓인지 스카프가 배낭 밖으로 넘쳐나와 기이한 움직임으로 내 목을 감았다.

내 모습은 내가 캡틴과 닮지 않았다는 주장에서 더욱 멀어졌다.


이 스카프는 뭐야!? 혼자서 움직였잖아! 살아 있어!

나는 섬뜩한 기분에 주춤거리며 스카프를 당기려 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살덩이, 살덩이로 만들어진 금속.


캡틴이 "거대 게" 라고 불렀던 그것이다.

내 몸을 뚫고 척추를 침범해 들어왔던 형용할 수 없는 악몽.

현실이었다. 그것은 나와 함께 여기 있었다. 날 따라왔다고! 왜 이제껏 캡틴의 스카프가 뭔지 알아채지 못했었지?

스카프의 감촉은 차가웠고, 순간적으로 동상에 걸린 듯 몸이 마비될 정도로 싸늘했다.

그 붉은 살덩이가 내 손가락을 감았다. 날카롭고 묵직한 바늘더미로 속을 채운 스타킹처럼 이상한 촉감이었다.

스카프가 내 몸을 스치는 곳마다 마비가 퍼져나가며 신경이 말단 말단마다 그 온도와 통제에 굴복하는 것이 느껴졌다.

꽃 같은 것과 살점으로 만들어진 실들이 스스로 꼬이고 얽히며 동물의 해골 같은 형태를 갖추었다.

소름끼치는 얼굴이 나를 보고는 웅웅 울리는 소음을 뱉었다.

"면책... 특권을... 주장하겠다!"


방의 모습이 다시금 바뀌었다. 심판자는 팔다리를 펼치며 공명했다.

"당신에게 법률상 허가되었던 권리는 현재...

위법 행위 및 분신 관리소홀로 인하여 정지되었습니다!"


무슨 말을 외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 살덩이 스카프한테 이야기하고 있는 건가?


"도망친 분신 및 비협조적인 

인공지능 행성 방어 네트워크는 처단될 것입니다."


또 모를 소리다.


"우리는 이 행성 자체를 분해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지금 건... 전혀 고무적인 이야기로 들리지는 않는데.


"암흑 물질 결정을 대기권상 궤도에 해방시켰습니다!

특이점 폭발으로 행성을 말소시킨 뒤...

사건의 지평선을 이용하여 우주 법정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지구 대기권에 블랙홀을 열겠다고?!

내 허름하고 방사능으로 가득한 세계는, 이렇게 마지막을 맞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나뿐일 테고.


유성의 꼬리를 닮은 빛의 선이 심판자의 검게 번쩍이는 팔다리에서 뻗어나왔다. 빛줄기는 서로 교차하며 내 주변으로 좁혀들어 기이하게 박동하는 육각형 모양 그물을 만들었다.

교차한 빛줄기들이 만든 보호막이 내 사지를 몸 쪽으로 눌렀다.


"일신상에 가해질 임시 구금 조치를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세계를 파괴하는 일이 당신에게 약간의 불편을 드릴 수 있습니다.

사지 및 소지품 관리에 주의하세요!"

거미 같은 모양새의 우주 괴수가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나는 그 먹이가 될 한 마리 나비에 불과했다.


심판자는 결정을 내렸다.

설득 같은 일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지? 우주 법정 같은 곳에서 내 뇌를 도려낼 심산인가?

지구는 끝났다. 나 또한 끝났다.

지금 여기 있는 모든 증거에 따르면, 나는... 지 캡틴이었다.


지 캡틴이라면 이제 어떻게 할까?




 


신고

'Archiv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pisode 107, 108  (7) 2013.02.03
Episode 106  (5) 2013.01.31
Episode 105  (4) 2013.01.03
Episode 104  (12) 2012.12.25
Episode 103  (4) 2012.12.22
Episode 101, 102  (8) 2012.11.13
trackback 0 And Comment 4
  1. 헐; 2013.01.03 14:4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소름 돋네요
    결국 이런 식의 결말이라니, 작가가 허용할까요?

  2. 포토샵 2013.01.06 16:4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우와앙 우와앙 이제 가자

  3. 어... 만화 끝난거에요? 2013.01.23 20:0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끝났나요?

  4. ㅁㄱㄹㅇ 2015.12.08 22:2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지 캡틴이라면... 차를 뿌려야지!!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