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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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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스카프가 앞뒤로 나부껴 내 목을 휘감았다.

뇌세포가 오작동하며 욱신거렸다.


육각형 고치에 거듭 구겨넣어지는 고통을 완화시켜 주려는 것이었을까?

아니었다. 내 인간적으로 제한된 시각이 지각할 수 없는 것들을 스카프는 보고 느낄 수 있었고, 그런 것들을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융합 바이러스가 내 몸을 관통해 들어와 세포 하나하나를 잡아먹고, 스스로를 확장하기 위해 내 몸뚱이를 이용했지만, 완전히 나를 잠식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곳에 있었다. 아니 저곳에. 나는 돌연 나를 이루는 수백조 개의 세포 모두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나와 세포 간의 관계가 주 제어장치와 슬레이브 드라이브에서 느슨한 공생관계가 된 것처럼.

바이오매트릭스가 내 새로운 눈으로 기능해 나는 수많은 것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스스로의 피부, 뼈, 살과 장기, 내가 입은 방염 재킷, 얼키고설킨 빛들이 우리를 스테이시스 필드 안에 고정시키며 만드는 그물, 심판자의 우주선의 두꺼운 결정질 벽 너머를.

시야가 호선을 그리며 한없이 넓어져 은하수의 줄기가 또렷해졌고, 별들은 한없는 아름다움과 역동감으로 불탔다.

나는 발 아래 있는 지구의 고요함과 북극 위를 춤추는 오로라를 보았다.

지구의 모든 대기층을 제각기 다른 질감과 명암과 색채로 느낄 수 있었다.

그 한순간, 저 아래편 총천연색 지구의 황홀한 선명함에 넋을 잃어, 내가 몸담은 세상이 닳아빠진 불모의 폐허라는 사실조차 잠시 잊고 말았다.

심판자의 함선인 흑요석빛 가시 돋힌 구체가 불길한 반짝임을 뿌리며 조용히 지구의 대기권 밖을 미끄러지고 있었다.

왜? 왜 내가 이 모든 걸 볼 수 있지?

바이오매트릭스가 내가─아니, 우리가─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는지 알리고 싶어하는 걸까?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없지?

아니면 바이오매트릭스는 그저 내게 누구도 목격한 적 없는 세상의 끝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바이오매트릭스는 유기체들의 문명을 약하게 만드는 일이나 필요한 것을 보호하고 처벌받아야 할 것을 처벌하는 일에 실패한 적이 전혀 없었다.

그들에게 실패는 몹시도 못미더운 일이었고,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고, 불가해한 일이었다. 

개연성있는 결론은 그 실패가 스캔 불가능한 존재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는 것뿐이었다.

바이오매트릭스는 지 캡틴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었다. 추측은 수없이 많았으나 전부 허섭하거나 완전히 정신나간 것들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 추측들에 대해 알고 싶지조차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것을 모르는 체했다. 그 중 대부분은 나의 끔찍한 형상이었거나 환상이었기에.

바이오매트릭스는 그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내게 투사시켰다. 순수한 비탄부터 분노에 찬 발악까지 제각각이었다.


검은 물질이 심판자의 테트라-시드 수송기에서 분리되어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바이오매트릭스는 내가 뒤쫓을 수 있도록 그 궤적을 강조해 주었다. 너무 친절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군. 이제 내 세상이 우그러드는 그 순간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장면을 영원히, 완벽하도록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겠지.


운석 같은 씨앗이 지구의 대기를 가로질렀고 이내 짙은 구름이 그 위를 부드럽게 덮었다.

씨앗이 폭음과 함께, 혹은 끝없이 메아리치는 속삭임과 함께 목표지점에 닿았다. 투하물을 품은 씨앗의 껍질이 부서져내리며 모든 것을 그 안으로 빨아들였다.


종착점.

모든 것의 끝.

특이점이 해방되었다.


사건의 지평선이 만드는 파동은 수천 개의 뒤집어진 무지개처럼 명멸하며, 떨어지는 동시에 솟았고, 빨아들이는 동시에 토해냈다.


셀 수 없는 빛깔의 겁화가 보였다. 이름붙일 수 없는 색채.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색채.

불길이 대기를 타고 퍼져 번개 폭풍과 불길의 소용돌이와 극광을 행성 전체에 폭발시켰다.

눈부시게 두렵고 끔찍했다.

특이점이 구름을 끌어들이며 세계 전체를 가로지르는 전무후무한 폭풍을 자아냈다.

불길이 닿은 곳마다 별의 표면이 벗겨져나갔다.

불꽃은 얼어붙은 산맥을 증발시키고 그 아래 묻혀 있던 대륙의 기반암을 불살랐다.

시공의 구멍이 범위를 넓히며 모든 것이 공허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무엇도 벗어날 수 없었다. 오직 파동을 추진력으로 이용해서 우주를 가로지르는 데 최적화된 이 우주선만 제외하고는.


나는 불현듯 심판자가 이 곳에 오기 위해 다른 세계 또한 지금의 내 세계처럼 파괴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파괴를 통해서 심판자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한 장소에서 즉각 다른 장소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심판자가 도착했을 때 내가 해체되는 듯한 감각을 느끼고, 일시적으로 죽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연합을 등지거나, 비위를 맞추지 않는 것들을 처벌하는 것.

이 스테이시스 필드는 나를 곧장 우주 의회로 날라다놓을 것이다. 심판자와 그 이동수단은 필요하기만 하다면 연합이 부르는 어디든 갈 수 있을 테니.


지구는 질량을 잃으며 점점 작아졌다.
무엇도 공허의 거친 인력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바이오매트릭스로서는 막을 길이 없었다.
왜? 심판자는 왜 이런 잔혹한 일을 하는 거지?
저것이 말했던 "인공지능 방어 네트워크"와 관련이 있는 걸까?
"정답이다." 바이오매트릭스가 속삭였다. 내 몸 가운데의 어느 세포가 내는 목소리였다.
"그 방어 네트워크는 공기 중의 방사성 먼지를 이용해서 스스로를 숨기고 있었다.
우리는 한 번도 우리의 분신을 잃었던 적이 없다. 그 사건을 위험신호로 여겼어야 했어.
우리는 유기체들을 지배 권역에 넣고 있었지만 비유기체들까지는 관리하지 않았고, 그래서 네 기억을 재생하는 것으로 간신히 진상을 알아챌 수 있었다.
생존을 위한 절망적인 도박 속에서, 너희의 문명은 어리석게도 지각능력이 있는 그리드를 탄생시켰다. 처음에는 사고의 뇌파를 섭취하는 데 지나지 않았지. 그 시점에서 멈췄어야 했어. 그 기계화된 역병이 다른 세상을 집어삼키기 시작하기 전에 말이야.
너의 세상에는 그리드의 악취가 진동한다. 그리드는 깊은 지하부터 까마득한 대류권까지 퍼졌어. 그리드는 온 행성에 해가 될 수 있는 일을 꾸미고 있거나, 이미 그런 일을 달성한 상태다. 우주에서부터 정화할 필요가 있었지. 네 행성은 돌이킬 수 없이 오염되었고 심판자는 치료법을 갖고 있어. 한 명의 병자를 죽임으로써 다른 자들을 살릴 수 있다면 감수할 만한 일이잖나."

음의 구체는 점점 자라나 영국보다도 큰 덩어리를 삼킬 수준이 되었다.
모든 것이 슬로우모션으로 움직였다.

네가 또 내 인지에 손을 대고 있는 거야? 아니면 사건의 지평선이 시간 자체를 멈추고 있는 거야?
그거 알아? 이제 아무래도 상관 없어. 내 알 바 아냐. 이건 죄다 너무 끔찍해. 이 영원 같은 순간이.
이 명료한 사실, 내가 우주에 남은 유일한 인간이라는 사실, 내 별이 나는 제대로 납득할 수도 없는 이유로 지워져 버려야 한다는 사실 전부.

머그컵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떨림 가운데에서 나는 금속의 노래를,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절대적인 죽음을 가져오는 저 허무의 구체와 완벽히 공명하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어디든 다른 곳에 있고 싶었다.
내 세상의 마지막 순간이 영원으로 뻗어나가는 이런 광경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여기 있고 싶다고 원한 적 없어. 제발 내보내 줘. 어디든 다른 곳에서 깨어날 수 있게 해 줘!
내 과거를 이용해서 환상을 만들어 줘. 너무 진짜 같아서 평생 빠져나갈 수 없도록.
이 모든 짓거리랑 상관없는 곳으로 돌려보내 줘.
넌 할 수 있잖아. 이 스테이시스 필드 안에 갇혀 있어도, 날 죽일 수는 없어도.
할 수 있잖아.
해!
...이렇게 부탁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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