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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60






Issue 160

크리스토퍼러스 파이 해친슨 : DEX-M 유닛 966912 : 뇌신경 로그 14 : 126 : 99


 피부에 부딪히는 빗방울을 느끼려고 헬멧을 벗었다. 여러 홀로그래픽 카드가 기록해둔 것처럼, 오래 전 과거의 인류는 일종의 종교적 의식으로 빗속에 서 있는 행위를 했다고 한다. 빗물이 피부를 천천히 녹여가는 고통을 견디며 용서나 사랑을 구하는 것이다. 사랑을 위해 피부를 희생시키는 일이 과연 인간다운 일일까? 내 피부가 기계로 짜인 나노 섬유로 강화된 것이 아니었다면 내 몸도 분명 이 빗물에 화학물질이 타는 매캐한 냄새를 새기며 흘러내리게 되었겠지.


핑크색 밴을 건물에 처박는 것도 인간의 이상한 습성 중 하나인가? 차주가 허둥거리다 벌인 실수인가? 아니면 차량의 G맵이 오작동한 것일까? 그런 일이 가능하기는 한가?


호버바이크가 내 등뒤에서 조용히 웅웅거리는 동안 나는 상황을 파악해 보았다. 병원의 건물이 그 한가운데로 파고든 밴을 품고 있었다. 기묘했다. 위화감은 언제나 신경을 긁는다.


두 가지 프로토콜이 머릿속에서 충돌했다. "밴에게 주차위반 고지서를 끊어라" 와 "스캔불가 유저에게 가라". 나는 밴을 향해 눈을 깜박였다. 기묘하다. 차량 14:48:54의 번호판은 '수성(水星)의 맨체스터 주 익명 가 12와 2분의 1로'에 속해 있었다.


도로 스캐너는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단순히 등록해 놓았을 뿐이겠지. 이 주소는 아주 명백하게 잘못되었다. 존재할 수 없는 주소다. 실제 위치와 주소를 상호 대조시키려고 하자 연산 루프가 일어났다. 누군가가 데이터베이스 목록에 이 주소를 입력해 두었던 것은 분명하나 지도에는 있질 않았다. 직접 뇌신경 문의 메시지를 밴에 전송했다.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묘한 일이다. 아마 저렇게 엉망진창으로 주차하던 도중에 뇌신경 수신기도 부서졌겠지.


등록 위반에 주차권 위반에 뇌신경 수신기 장착 위반까지! 이쪽이 이겼군. 스캔불가 유저는 좀 더 기다려 주셔야겠어. 나는 밴으로 다가가 미닫이 문을 부수다시피 열어 젖혔다.


음성 답변이라도 돌아올까 싶어 다시 한 번 모든 뇌신경 대역에 물음을 보냈다.


"차량 14:48:54! 보고하도록." 나는 명령했다. "왜 이런 곳에 주ㅊ…?"


뒤늦게 나는 어떤 응답도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시트 위에는 시계에 묶인 파인애플이 놓여 있었다. 접속불가자들의 표식, 과일 폭탄. 폭발물을 유기체 내부에 품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과 과일 폭탄은 꼭 닮았다.


관절을 움직이려 했지만 반응이 한 박자 느렸다.

타이머가 달칵 소리를 냈다.


온 세상이 백열했다.



Credits

아트 디렉터 :   http://alexiuss.deviantart.com
일러스트 : http://iidanmrak.deviant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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