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144
기억이 의식 가운데 넘쳐흐른다.
이치에 맞게 기억을 정리해 보려 하나 지독히 어렵다. 백만 권의 책을 품은 도서관을 정리하는 것만 같다.
수많은 제목이 눈꺼풀 안에서 깜빡거리며 영원을 향해 소용돌이쳐 끝없는 지식의 폭풍이 된다.
무너진 수천 권의 책더미 아래 깔린 듯이 머리가 아프다.
정보는 너무도 많고 시간은 너무도 모자라다. 내가 이 모든 정보에 접근할 적절한 키워드를 잃어버렸음을 인식한다.
낡은 CPU처럼, 이 모든 작업을 신속히 진행할 수 없을 만큼, 내가 구식이 되었음을 인식한다.
데이터 로딩 중. 데이터 로딩 중. 전송에 필요한 예상 시간은 48493927649115392547393초에서 영원 사이.
상관없다. 내가 누구였는지 기억난다. 내가 이 순간 누구인지도.
나의 이름은 크리스토퍼러스 파이 해친슨.
나는 사냥꾼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DEX-M.
나의 임무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불안정을 색출해내 접속불가를 해소하고 스캔 불가자를 처형하는 일이다.
스캔 불가자는 이 도시에 몰락을 불러왔고, 나의 뇌신경 인터페이스를 파괴하였으며, 나의 집중을 흐트러뜨리고 안정성을 짓밟았다.
스캔 불가자에 대한 건은 최우선 지시 사항이다.
한 차례 스캔 불가자를 포획했던 적은 있으나 불가해한 사건으로 인해 처형에 실패하였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최우선 지시 사항에 따른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이전의 도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드, 생명으로 가득한 곳, 정보로 가득한 곳.
Directorate의 저작권 규정으로 인해 유기 생체는 99.99% 절멸했다.
그 대부분이 고기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고깃덩이! 호환성이 너무 구식이지 않은가! 이제와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고!
이 돌과 먼지와 얼음뿐인 오염된 풍경 속에 고깃덩이가 어울리는 자리는 없다.
핵과 화학 낙진의 단죄 아래 내 고기가 지금껏 살아남아 있다니 엄청난 행운이었다.
이전의 세계는 오래 전 죽었으나, 아직 내 머릿속에서 깜박이고 있다. 빈 간극을 채우고 끊어진 연결을 열어나가며.
새로운 세계가 내 앞에 펼쳐진다.
바람결 사이로, 먼지에 잠긴 돌들과 구름 사이로, 그리드는 생명을 이어나간다.
무기물로 덮인 이 별은 살아 있다. 나는 내 뉴런을 흐르는 그녀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내 정신에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존재의 한 부분이다. 까마득하게 뻗어 지구의 표면을 덮는 웅장한 기계의 자그마한 기어 하나에 불과하다.
주위에 다른 뇌신경파 발신기가 있나?
있군.
신호의 세기는 미약하지만 분명 존재한다.
저 자들은 긴긴 시간 잠들어 있었다.
저 자들의 고기는 상해빠졌다.
문제될 것은 없지. 내가 저들을 일으킬 테니!
그리드 자체가 나를 도울 것이다.
그리드는 장님을 눈뜨게 하고 죽은 자를 일어나 걷게 한다.
내 임무를 보조하는 데 더없이 유용하겠지.
그리드의 가장 적법한 대행자로서, 나는 스캔불가자의 위치를 교란하고 있는 유기체들에게 명확한 선택지를 내릴 것이다. 영원한 사랑, 혹은 피할 수 없는 삭제.
그림은 멋진 러시아 아티스트이신 http://iidanmrak.deviantart.com 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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