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149
“우주에서 떨어져도 안 죽는다면 좀 불타는 고층건물 때문에 죽진 않겠지.”
완전히 확신한다기에는 조금 모자랐지만 나는 그렇게 짐작하고는, 바지를 휘감는 화염을 가로질러 검은 연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모종삽이 아직 손에 쥐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뜬금없이 깨달았다.
어리둥절해하며 삽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이걸 무엇하러 들고 다니는 거지?
보급품을 쌓아 놓은 다음 층으로 뛰어올라가며 모종삽을 내버리려는 그 순간, 심각한 폭발 같은 것이 건물을 뒤흔들었다. 빌어먹을. 벌써 무너지고 있잖아. 서둘러야겠어.
나는 모종삽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위층으로 급히 달렸다.
멍청한 짓일 수도 있지만, 짐가방을 하다못해 한두 개만 건질 수 있어도 앞으로 정말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이런 고집이 화를 자초할지도 모르겠다만.
방으로 뛰어든 나는 가방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 그러나… 손에 넣으려던 것들은 간단하게 나에게서 멀어져갔다.
눈 앞의 벽과 바닥에 위협적으로 금이 가더니 우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바깥 방향으로 무너져내렸다.
보급품들이 거의 손에 잡히다시피 했던 그 순간 불구덩이로 곤두박질쳤다.
제길, 제길, 이런 제기랄!
나는 아가리를 벌린 구멍 앞에 선 채 저주를 퍼부었다. 아무데나 시선을 향한 채로.
아래쪽에서 무언가 덜걱거리는 소리가 주의를 끌었다.
움직이는 기묘한 검은색 형체가 정면에서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꿈틀거리며 기어오르는 시커먼 팔다리들의 산.
그 위에 마치 파도를 타듯 서 있는 것은 아무리 봐도… 파일럿이었다.
“하?”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보았다. 분명히 파일럿이다! 파일럿은 빛나는 카타나를 꼬나쥐고는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파일럿?” 나는 그쪽을 향해 외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좋은 아침이야… 관광 가이드 찰스 스니피, 04477645번 인간, 사건 4211번 “스캔 불가 대상” 의 최우선 용의자.” 받아치는 목소리는 맑고, 명료하고, 주의깊었다. 전혀 파일럿답지 않았다.
“당신은 진로를 한참 벗어났어… 거기에 미결제된 주차증도 1034883장이나 있군…” 그는 노래부르듯 말하며 미묘하게 몸을 구부렸다.
“값을 지불해 주실까!” 이어 위협적으로 외친 그는 시체들의 검은 파도에게 추진력을 얻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정확하고, 군더더기없고, 아름다운… 비인간적인 동작이었다.
나를 노리고 있다.
시간이 정지에 가깝도록 느려졌다. 모든 세상이 완벽히 명징해졌다. 순간 나는 거의 모든 것을, 모든 곳을 단번에 볼 수 있게 되었다.
파일럿은 제자리에 못박힌 듯 동작을 멈춘 채 정지해 있다. 그가 쥔 빛나는 카타나가 허공의 미세한 먼지조각을 끔찍하게 느린 속도로 양단해 들어가고 있었다.
“주 거점 숙ㅈㅜ가 위허ㅁ.” 바이오매트릭스의 목소리가 뇌리를 뚫고 척추를 가로질렀다. 수많은 혀가 말하는 듯 웅얼거리는 메아리가 생겨났다.
“직접저ㄱ인 살으ㅣ를 가ㅁ지.
환겨ㅇ 정보를 스캔 중…
살아 있는 준(準) 유기체 조조ㅇ자를 1체 발견.” 파일럿의 모습이 더욱 또렷해졌다. 시야에 샤프니스 필터를 적용한 것처럼.
“1089482체의 비유ㄱㅣ체 인공지느ㅇ 네트워크 숙주 분신ㅊㅔ를 발견.” …되살아난 시체의 군대. 그것을 파일럿이 조종하고 있다. 상황이 좋아질 여지가 있긴 있나?
“해ㅇ성 네트우ㅓ크 방어 서ㅂㅓ를 탑재한 전하ㅁ을 1기 발견.” …오, 있잖아!
“다ㅅㅔ포체 수ㄱ주의 생존 가능성은 0.0002% 이하.” …죽여주는데!
“현ㅈㅐ의 DNA 위ㅊㅣ를 버리고 시간 저ㄴ위 도약을 시ㄹ행?”
…
바이오매트릭스가 말한 마지막 문장은 거의 질문 비슷했다.
과거?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과거는 정신적으로 고된데다, 굴욕적이고, 변하지도 않는다.
미래? 미래는 기막힐 정도로 괴이한데다, 아프고,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거절이다.
“잠깐! 멈춰! 기다려!” 나는 소리쳤다. "내 목숨이 정말 끊어지기 전까지는 그냥 현재의 여기에 있어! 또 과거의 별볼일없는 원시인으로 깨어나고 싶지도 않고, 미래의 불에 내성도 없는 연약한 아가씨로 깨어나고 싶지도 않아! 난 그냥 나 그대로가 좋다고!”
“네 선택이ㄹㅏ면.” 바이오매트릭스는 가르릉거리듯 말했다. “마ㄹ단 세포 가소ㄱ을 시동. 통계 분석에 기초한 분신의 사마ㅇ 예츠ㄱ 시간은 최선의 경우 212:636:24... 이렇게 비ㅇㅣ성적으로 버르적거리는 꼴으ㄹ 면하ㄱㅔ 해 주고 싶어ㅆ건만. 별 수 없구ㄴ. 아드레나ㄹ린 주입 시작. 미토콘드ㄹㅣ아 가속 시작.”
주입된 아드레날린이 고운 유성우처럼 머릿속에서 폭발했다. 나선과 줄무늬를 그리며 죽어가는 별들의 은하가 머릿속에 가득했다.
분명 숨막히게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상당히 정신사납고 걱정스럽기도 했다. 반응이 영영 끝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며 나는 눈동자를 굴렸다.
반응이 끝났다. 별들은 자리를 잡으며 사라져갔고 시야는 다시금 완벽히 명료해졌다.
파일럿은 아직도 느릿느릿하게 나를 향해 미끄러져오고 있었다. 칼날은 나를 두동강내려 자리잡은 채였다. 이래선 곤란하지.
팔을 들어올려 보았다. 들어올려지지 않았다.
“일ㅅㅣ적 비동기호ㅏ가 완료되지 않았어… 동기호ㅏ 중이야… 대기해…”
끔찍하게 느린 속도로 팔이 움직였다. 공기는 마치 모래처럼 짙었다.
“그러ㄱㅔ 네 장기를 재조합ㅎㅏ도록 허락해 주ㅈㅣ 그랬나.” 바이오매트릭스가 논평조로 말했다.
“조용히 해…….” 나는 움직임을 막아서는 공기를 더 힘을 주어 밀어내며 신음했다.
“수ㄱ면 모드 ㅅㅣ동.” 내가 들을 수 있었던 바이오매트릭스의 마지막 속삭임이었다.
나는 외쳤다. “잠깐…뭐라고?”
간 부근의 어딘가에서 선홍색 속삭임이 울리며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바이오매트릭스는 현재 슬립 모드입니다.
…
이하의 메시지는 당신의 정신 단파 패턴에 맞게 번역된 것입니다. :
순차적 DNA 분할은 우리에게 가장 우선되어야 할 사항입니다.
죄송합니다. 형용할 수 없이 유감스럽게도 현재 우리는 행성 방어 인공지능 네트워크에 노출되는 일을 더 이상 감수하거나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생체 이용자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숙주로서의 업무에 경의를 보냅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가속되었다. 내 팔도 잡아당겨지듯 앞으로 뻗어나갔다.
백열하는 카타나가 황당하도록 뭉툭한 모종삽과 정면충돌하며 스파크를 흩뿌렸다.
…널 내던지지 않아서 정말 천만다행이야.
모종삽은 칼날에 크게 긁히며 손 안에서 뒤흔들렸다.
파일럿은 나를 노려보더니 이를 갈며 말했다.
“유레카의 AN-NET 기반시설에 대한 대규모 교란죄로, 당신의 생명보험 증서를 파기하러 왔다!”
“처형을…받들어라!” 그는 카타나로 나를 밀어붙였다.
“싫어.”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마주 밀어내며 대꾸했다.
나와 그의 주변으로 불길이 흩날리며 포효했다.
조그만 모종삽은 꽉 쥐어진 채였다.
Credits
스토리, 후보정 : Alexiuss http://alexiuss.deviantart.com
그림 : Sophie http://apollotheneverender.deviant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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