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ENT
파일럿이 사라졌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보통 때 같으면 캡틴은 파일럿이 비행 장치 만들기 같은 이상한 임무로 파견됐다고 설명을 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캡틴이 되려 나한테 물었다. 파일럿이 어디 갔는지, 파일럿을 보긴 했었는지, 그리고 파일럿이 돌아오지 않으면 파일럿의 일을 대신 할 수 있을지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쓰인 종이를 건네받았다:
(( 스니피가 자는 동안 '햇볕 퍼레이드'용 복장으로 갈아입힐 것. 상징성을 위해 머리에 큰 양초를 고정시키고 불을 붙일 것. ))
"그러니까, 내가 자는 동안 내 옷을 스스로 갈아입으라 그겁니까?"
"그렇다네."
"아시다시피 그럴 수가 없잖아요?"
"햇볕을 생각해 보게! 애들을 상심하게 만들고 싶나?"
"싫다니까요! 애들은 또 뭔데요? 됐어요!"
캡틴이 '새로운 기계 신민'을 만들라 명받은 엔지에게 정신을 판 동안 나는 슬쩍 도망쳐 나왔다.
파일럿이 평소 남기던 흔적을 찾을 수 있길 바라며 나는 하루 종일 주변을 수색하고 다녔다.
데드 존 가이드를 위한 훈련은 나를 썩 괜찮은 추적자로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파일럿은 평소에 크레파스나 반짝이, 페인트 같은 흔적을 뿌리고 다녔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밖으로 뛰어나가자마자 그대로 증발해 버린 것마냥.
빌어먹을.
저녁에 건물으로 돌아왔을 때 누군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캡틴과 엔지가 얘기하고 있겠거니 생각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들이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무언가였다...
COMMENT
말하는 가재도구들이 떠드는 쇳소리가 아직껏 끝도 없이 머릿속에서 윙윙거리고 있었다. 그 소리를 외면하려 노력하며 나는 격한 혼란 속에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녔다.
걔들은 정말로 캡틴을 죽이려고 작당한 거야?
처리했다고...? 파일럿을?
그것들은 대체 누구야?
왜 머그컵이나 빨대, 무당벌레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는 거고?
왜 내가 쟤네들이 얘기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야?
내 정신줄이 완전히 끊어지기라도 했나?
내가 미친 거야?
아 그래, 이 상황을 말 되게 설명할 길이 있긴 있지.
분명히 캡틴이 날 골탕먹이려고 파일럿이랑 같이 오디오 플레이어에 이런 목소리를 녹음해서는 마루 밑에 감춰놓은 거겠지.
그래! 틀림 없어! 호구처럼 또 속다니...
하... 말하는 머그컵이라니!
보나마나 지금 달력을 확인해 보면 오늘자에 이렇게 적혀 있을 거야. "가재도구들의 반란, 스니피의 왼쪽 신발짝만이 사태를 종식시킬 수 있노라" 라고.
캡틴과 엔지의 발자국은 빌딩 밖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설명이나 해명, 뭐든간에... 최소한 누가 옆에 있기라도 해 주길 빌면서 흔적을 따라갔다. 언제나 미친 짓을 하는 캡틴이나 날 생무시하는 엔지 옆에 있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지만, 그래도 상관없으니까.
작은 등짐과 최근 주운 라이플을 메고 일행들이 지났을 법한 눈길을 짚어가려 했다. 하지만 눈이 너무 많이 내리고 있었기에 누구든간에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은 요원했다.
힘빠지네. 보통 캡틴을 찾는 건 황당하도록 쉽단 말야. 폭음 같은 거나 명령을 해 대는 소리만 따라가면 되니까.
어떻게 캡틴이 방독면을 끼고도 그렇게 큰 소리를 내는지 모르겠다. 전기 앰프 같은 걸 쓰나? 그런 거라면 아마 음성변조를 동시에 하고 있겠지. 안 그러면 되먹임이 심할 테니까.
나는 여기저기마다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거대한 건축물들에 경도되어 넋을 잃었다. 폐허가 되어 버렸으면서도 Directorate의 거대한 구조물은 압도적일 만큼 위용 넘치게 붙박혀 있었고, 지독하게 을씨년스러웠다.
하지만 끝없이 넓어져만 가는 빙하, 핵겨울이 자아내는 얼음과 눈의 산이... 저것들을 먹어치우고, 우리 문명이 남긴 판에 박힌 묘비들을 깎고 부수어 무(無)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매머드와 닮은 돌연변이 괴수의 뼈가 얼어붙은 호수 곁에 버려져 있었다. 짐작하기로 이 흉물은 아마 예전 세대들의 여흥거리 용도로 키워졌을 것이다. 아마 생화학 무기 덕분에 이 꼴이 났겠지. DNA 구조를 망가뜨려서 통제불능으로 진화를 촉진시키는 바이러스에 조작당해서 말이다. 뼈에 금이 가더니, 산산히 부서져내려 내게 은색 재를 덮어씌웠다.
나는 가루를 들이마시게 될까 싶어 흠칫 방독면을 붙잡았다.
아니, 기온이 너무 낮다. 생화학 무기는 비활성화되어 얼음 속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싸늘한 공기에 무용지물이 되었겠지.
얼어붙은 폐허 가운데로 헤쳐 들어갈수록 무언가 진득히 내 등에 시선을 박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게 뭐든간에 줄곧 소리도 발자국도 없이 날 따라오고 있다 그거다. 조용했다. 포토샵 같은 돌연변이 벌레라기에도, 하다못해 불운한 희생자를 찾아다니느라 얼음 위를 미끄러져 다니는 유령이라기에도 너무 조용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아냐, 이럴 리 없어! 절대 이럴 리가 없다고!
'Archiv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pisode 103 (4) | 2012.12.22 |
---|---|
Episode 101, 102 (8) | 2012.11.13 |
Episode 93, 94, 95, 96 (6) | 2012.09.15 |
Episode 90, 91, 92 (17) | 2012.07.07 |
Episode 89 (6) | 2012.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