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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63








Issue 163

ENTRY 57894__1122 : 최고 관리자 : 알렉산더 그로모프 박사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할 수 없다.

내가 어떻게 된 게 틀림없다.

무슨 조화로 불길 속에서 빠져나왔는지 떠올릴 수가 없어.

어떻게 도망쳤지?

머릿속이 백지, 온통 백지다.

두려움에 몸이 굳어서, 물과 불의 벽 사이에서 질려 있었다가…

눈을 감고, 최후를 기다렸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나는 달음박질치고 있다. 내가 왜 달리고 있지? 물의 벽이 바로 등 뒤에서 굉음을 내며 나를 뒤쫓고 있으니까.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헐떡거리며 속도를 늦추었다.

이게 현실일 리가 없어. 나는 중얼거렸다. 분명 꿈이야.


아니지.

뇌신경 송신파가 내 머릿속을 뒤집어엎고 기억을 잘라 부수어서겠지.

뇌신경 G고글도 완전히 오작동하고 있다.

시야가 부옇고 해상도가 낮아 픽셀이 깨진다.

고글에 내장시킨 나노크리스탈로 렌더링되는 시야는 엉망이었다. 처참한 현실부터 만화풍 필터링까지 뒤섞이는 시야가 어떤 악의를 품고 나를 방해하려는 것만 같았다.

제길.

고글을 머리통에서 떼자마자 안구가 녹아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만 아니었다면 이 물건을 당장에 벗어 내던졌을 것이다. 저번에 한 번 G고글을 벗으려 했을 때는 대번에 눈이 따가워지고 화끈거렸었다. 빌어먹을 공기오염.


물이 나를 덮쳐왔다.


무엇이든 부여잡으려 발버둥쳤다. 정말 무엇이든.

마스크까지 넘쳐든 물이 틈새로 스며 숨통을 막았다. 나는 혼비백산해 손을 내저었다. 재킷이 젖으며 묵직해져 몸뚱이를 물 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놀랍게도 나는 익사하지 않았다.

두 팔이 저절로 어떤 물건에 감겨들었다. 플라스틱 설탕가루와 “도넛과 이것저것” 이라는 글씨로 장식된 분홍색 도넛 모양의 낡은 구조물이었다. 도넛은 커다란 구명부표처럼 나를 싣고 수면으로 떠올랐다.


플라스틱 도넛을 붙들고 수장된 도시 한가운데를 정처없이 떠가며, 나는 캡틴이 어디 있을지 궁금해졌다.

캡틴은 이런 고약한 상황에서 물 위를 걸을까? 지구를 가로질러 헤엄칠까? 그도 아니면 그냥 공중에 앉아 있을까? 운이 나빠 죽게 되는 가능성 자체에 내성이 있는 삶이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도넛이 삐걱거린다.

캡틴의 피를 뽑아 백신으로 만들어 이 멸망한 세계를 고칠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일까. 혹은 얼마나 현실적인 생각일까. 만일 내가 조금만 더 빨리 행동했더라면. 내가 미래를 알았더라면. 내가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Credits

아트 디렉터 : http://alexiuss.deviantart.com/

일러스트: http://rileystark.deviant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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