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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향하는 길에서 by 스니피



9월 어쩌고저쩌고:



 슬프게도 이 칩은 녹음만 가능하고 재생은 되지 않는다.

 도시의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 캡틴과 함께 이동하느라 너무 오랫동안 시간관념을 잊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은 9월이 아니라 10월일 터이다. 어쨌든 별로 신경쓸 만한 일은 아니다. 매일매일은 핵겨울 덕분에 춥고 하늘에서는 언제나 눈이 내리거나 "재가 내리니까". 아주 가끔은 두껍고 우울하고 시커먼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집고 들어오기도 하지만.

 과거에는 수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바라볼 만한 미래는 별로 없지만, 그래도 어떤 이유로 나는 삶을 이어 가고 있다. 그 이유가 끝없이 캡틴의 놀잇감이 되는 것이긴 해도.


 매일 잠들기 전에 캡틴이 다음 날 어떤 끔찍한 짓을 할지 생각하곤 한다. 이번 주에는 그 빌어먹을 인간은 나한테 계속 괴상한 옷을 입히며 새 "배역들"을 정해 주었다. 이게 어느 새에 이런 옷을 뒤질 시간을 냈담? 어제는 눈을 떠 보니 난 웬 할머니 같은 옷을 풀세트로 차려입고 있었고 캡틴은 나를 "스니피 숙모"라고 불렀다. 그리고 "삐에로 스니피" "슈퍼히어로 스니피" "좀비 스니피" 같은 것도 있다. "좀비 스니피" 놀이는 보통 나한테 흙을 뿌리고 "좀비가 나타났다! 저 남자도 감염됐어! 다들 도망가!" 운운하는 소리를 외치며 도망가다가 하루가 끝날 때쯤 몽둥이 같은 물건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면서 끝난다. 나는 재킷의 후드 밑에 목도리를 둘러서 충격을 줄이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다.

 제일 최악이었던 건 아마 "소방관 스니피"일 것이다. "삐 삐 삐 삐 삐. 화재 신고가 접수되었습니다! 12번가와 브로드웨이에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하는 비명을 듣고 일어났던 날 말이다.

 그때 캡틴은 심지어 "비상상황 모의 시험" 을 한답시고 내 신발에 불을 지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게 캡틴에게는 만족스러울 만큼 사실적이거나 긴장되거나 긴박해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다음날 캡틴은 어떻게든 마천루 하나에 통째로 불을 지르고는 "애들을 구해요! 왜 아무도 애들한테 신경을 안 쓰는 거야!" 라고 소리치며 나를 건물 안으로 밀어넣으려 했다. G Directorate에서 지급받았던 유니폼이 방염가공된 물건이라는 사실에 천지신명에게 감사해야겠다.

 마치 내 정신과 인내심을 시험받고 있는 기분이다. 그 인간을 목졸라 죽이기만 하ㅁ... 아니, 그건 그리 쉽지 않은 일인데다 그렇게 하면 난 완전히 외톨이가 될 테고, 어쩌면 한술 더 떠서... 애 돌보듯 다뤄야 하는 파일럿을 떠안아야 할지도 모른다.

 대체 이 광기의 연출자는 잠을 자긴 하는 거야? 주의깊게 지켜보려고 노력하려고는 하지만 나는 항상 살아남을 궁리에 바쁘다 보니 저 인간에게 제대로 신경을 기울일 틈이 없다. 내가 찾아내는 식료품은 날이 갈수록 점점 줄어들고 있고 통조림은 끔찍할 정도로 유통기한을 초과한 물건이 대부분이라, 한 캔 한 캔이 도박과 비슷하다. 그러니까 토하지만 않으면 내가 승리하는 도박 말이다. 나는 캡틴이 방심하는 때를 찾아보려 했지만 아무리 봐도 불가능해 보인다. 눈을 감기 전에 캡틴이 선 채 내 주변을 서성거리는 모습을 보고 나면, 아침에 언제 눈을 뜨든 그건 똑같은 자리를 서성거리며 나를 감시하듯 기분 나쁘게 서 있다. 사람이 선 채로 자는 게 가능하던가? 이쯤되면 익숙해질 만한데도 그 실루엣은 가끔 제법 오싹하다. 가끔 캡틴이 수직으로 잠을 자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된다. 혹은 나를 헷갈리게 하거나 골탕먹이려고 마네킹을 갖다 놓는 것이거나.

 그뿐이 아니다. 빌어먹을 아침시간마다 캡틴은 나를 깨우려고 매일매일 갖가지 커다란 소음을 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르는 날"이나, "경적 울리는 날", "박살난 피아노", "밴조", "부부젤라의 날"에, "쓰레기통의 날", "괴상하게 노래부르는 날", "색소폰의 날" 등등등. 뭐, 그래, 어쨌든 색소폰은 그렇게 끔찍하지 않았다는 건 인정한다. 캡틴은 제법 들어줄 만한 연주를 해서 내게 긍정적인 면에서 놀라움을 선사했다.

 우리가 갖고 있던 마지막 배터리는 마이크로플레이어로 "냥캣"을 무한재생하느라 낭비되고 말았다. 정신나간 한 주를 보낸 뒤 나는 마이크로플레이어를 "불운한 사고" 로 "말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은 끔찍한 진동 덕분에 잠을 깬 적이 있었다. 분명 그 건의 일등공신은 파일럿일 거다. 둘은 자고 있는 내 몸을 쇼핑카트에 묶고 어딘가에서 찾은 "잭애스" 의 포스터를 재현하려고 했다.
 세계 최후의 상식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정말 못 할 짓이다. 그래도 적어도 저치들의 뒷정리는 해 줄 필요가 없다. 되는 대로 부수고 다니고 버리고 싶은 건 아무데나 내던져도, 어차피 새 음식이나 오염되지 않은 물을 찾으려면 우리는 계속 어디로든 움직여야 하니까. 
 저번에는 그 둘은 "현존하는 모든 신호등"을 향한 전쟁을 선포했다. 그들을 멈추게 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캡틴은 날더러 "조약"을 꾸미라며 저 혼자 쩌렁쩌렁히 주워섬긴 웅변을 받아쓰게 하고는, 그 조약을 "적"에게 전달하게 시켰다. 물론 내가 말한 적이란 건 예상하다시피… 그 지랄맞은 신호등 얘기다. 왜 캡틴을 위해서 이런 짓을 하냐고? 제일 주된 이유는 내가 "캡틴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파일럿이 내 라이플을 힘으로 빼앗거나 내가 자는 틈에 슬쩍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돌연변이 투성이인 야생은 절대 호의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 라이플을 떼놓고 사는 건 달갑지 않다. 말해 두겠는데 파일럿보다는 내가 조준을 더 잘 하거든. 덧붙여, 그 둘은 내가 불복하면 내 물건들을 전부 "전자레인지에 돌려 버리겠다"는 시덥잖은 협박을 한다. 파일럿이 제대로 돌아가는 전자레인지를 어디서 구해 올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마 그쪽들이 말하는 건 내 물건들을 전부 박살내고 그 위에서 춤을 춘다는 뜻일 거다. 아니면 한바탕 불을 놓겠다는 뜻일 수도 있고. 종종 파일럿이 내 뼈를 분질러 버리겠다는 조의 말을 중얼중얼대는 걸 듣곤 한다. 캡틴은 지나치게 나를 신용하고 있지만 나는 "그랜드마스터의 위광 아래에서 춤출 자격이 없다" 라나.

 우으와아아ㅇ으ㅡ어아ㅏ아아아ㅏㅏㅏ아

 실례, 방금 웬 날아다니는 상어가 내 얼굴을 덮치려고 했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이 꾸물거리는 지렁이 비슷한 괴물한테 풍선을 묶어서 띄운 모양이다. 붙어 있는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안녕, 내 이름은 포토샵이라고 해! 먹이로는 스니피를 줘!"

...이건 정말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왠지 모르게 이 건에 대해 더 알고 있었어야 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넌 뭘 기대한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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