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chives

Episode 198E





Issue 198E




인간 실험대상: 찰스 스니피

:G-Dir 직원 사용자 ID #04477645:

소속: 시공 거점숙주



딱 따닥 딱 쉬시식 딱 닥 쉬이익 츠으으 딱 따닥 딱


“로비 보이”는 축음기 모양 자동응답기에서 골동품이 된 디스크를 우아하게 들어내며 우리 쪽으로 꾸벅 허리를 숙였다.


파일럿은 흐늘거리는 엔지를 붙든 채 추고 있던 춤사위를 멈추었다. “고마워여 클라우스 친구. 쥐이인짜 좋은 곡이었어여.”


파일럿이 이쪽으로 다가왔을 때 나는 물었다. “왜 이름을 클라우스라고 붙인 거야?”


“그게 쟤 이름이니까 그렇지, 설 익은 블루베리 같은 스니삐. 그렇게 레모네이드처럼 시큼하게 굴지 마. 클라우스는 블루베리한테는 대체로 무해하단 말야. 뭐 클라우스의 벌을 뺏어갔던 엔지한테야 땍땍거렸지만. 저번엔 엔지한테 죽빵을 날린 적도 있다고, 알다시피.”


나는 내 눈앞에 있는 그 ‘대체로 무해한’ 괴생물체를 지그시 보았다.

“이봐 117, 만약 지금 내가 등을 돌리면 저 괴물이 우릴 잡아먹으려고 할까? 어떻게 생각해?” 나는 스카프에게 물었다. 스카프는 침묵한 채였다.


파일럿이 물어왔다. “117이 누구야? 117이라는 G-라벨이 붙은 친구는 안 보이는데.” 그는 방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의심해 보겠다는 양 사방으로 머리를 돌렸다.


“알 거 없어.” 나는 짜증스러워하며 가슴팍을 긁어 보았다. 바이오매트릭스는 응답하지 않는다. 왜일까.


소파의 반대편에 앉은 캡틴은 “부기맨이 찾아와도 겁먹지 말아요” 운운하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머그는 그 곁의 커피 테이블에 놓여 잔잔히 김을 피워올렸다. 붉은색 하트 모양이 내 쪽으로 향해 있다. 불안한 시선이 그 문양으로부터 이쪽으로 꽂혀오는 것 같았다. 어깨나 으쓱하고 웃어넘기려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나는 캡틴에게 조금 더 다가붙어 보았다. 머그의 하트 문양은 검은색 바탕 위를 아주 미묘하게 미끄러져 나를 향했다.


“그만 좀 쳐다보라고!” 나는 머그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다가 캡틴과 부딪히고 말았다.


“…부기맨을 만나면 뭘 할지 알려줄게요.” 흥얼거림을 멈추지 않은 채 캡틴은 내 쪽으로 돌아앉아 나를 빤히 보았다.

파일럿도 돌아보았다. ‘클라우스’도. 머그도. 사람을 속속들이 뜯어보는 듯한 그 시선들을 내가 견딜 수 있었던 시간은 고작 일이 분이었다.


“가볼게요.”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등판에 꽂히는 시선들을 느끼며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문틈에서 머리를 빼끔히 내밀어 보았다. 셋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화장실 안으로 돌아들어 수도꼭지를 열었다. 수도꼭지는 “쿠르르러꿀렁꿀렁” 하는 끔찍한 울부짖음을 토하더니 한 방울의 시커먼 액체를 짜냈고 그 액체는 수도꼭지의 테두리에 매달렸다. 나는 정신사나운 소음을 멈추기 위해 재빨리 수도를 닫았다.

검은 액체 한 방울이 수도꼭지에서 떨어져나왔다.

방울이 떨어질 경로를 눈으로 따라갔지만, 물방울은 낙하하지 않았다. 완전한 검은색 구체의 모습을 한 작은 방울은 그저 세면대 한중간의 공중에 멈추어 있었다.

“하?” 나는 물방울을 의혹으로 들여다보았다. “이건 또 뭐야?” 중얼거리며 조금 더 가까이서 들여다볼 생각으로 몸을 낮추었다.

여전히 방울은 세면대의 표면을 때리지 않았다. 응시가 노려봄이 되었다. “떨어지라고!”

내가 명령까지 했지만 방울은 중력을 무시하며 공중에 떠 있을 따름이었다.

“난 안 미쳤어. 알아?” 검은 구체는 조용히 허공에 걸려 있었다.

“알았어! 됐다고! 네 마아아아음대로 해!” 못박은 나는 세면대에서 돌아선 뒤 이유도 없이 신경질적으로 수건을 쥐어들고 화장실을 나섰다.


“오! 무쉬뇨르 스니퓌가 드디어 수건을 골랐군! 해수욕 시간이 다가온 모양이야!” 캡틴이 선포하며 내 어깨를 잡았다.


나는 비뚜름히 멈추어선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저 엘리베이터는 두 번 다시 안 탈 겁니다. 그냥 알아나 두시라고요.” 


“좋은 생각일세! 슬개골 건강을 위해서는 엘리베이터보다 계단이 더 좋은 선택이지!” 캡틴은 계단 쪽으로 손짓을 했다.


엔지를 쇼핑카트에 실은 파일럿이 계단으로 그 카트를 굴렸다. 카트는 층계 하나마다 천지가 내려앉는 소리를 내며 덜컹거렸다. 깨어날 때쯤이면 멍이 천 개는 더 생겨 있겠군. 

12층에 도착한 내게 보인 풍경이 망상을 중단시켰다. 12층은 두께가 40센티는 되어 보이는 방염 강화유리로 막혀 있었다. 유리 안쪽은 새집처럼 멀끔했다. 이 층은 어쩌다 이렇게 봉인된 걸까. 사실 좀 수상할 정도로 깨끗해 보였다. 공간 안쪽에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접속불가자 손님을 환영합니다!” 나는 강화유리를 툭툭 두드려 보았다. 꼼짝하지 않는다. 환영은 개뿔.


“그러지 마, 스니퓌. 여긴 오래 머무를 만한 곳이 아냐. 와이파이가 없단 말야. 금방 지루해질걸.” 파일럿이 이쪽을 향해 손짓했다. 캡틴은 보무도 당당하게 계속 전진해나갔다. 나는 일행을 뒤쫓았다.


다음으로 맞닥뜨린 계단참은 콜라병 무더기로 덮여 있었다. 파일럿이 그 사이로 카트를 밀어붙이자 콜라병은 아래층으로 우르르 굴러내려가며 끔찍한 불협화음을 만들었다. 나는 11층의 유리벽을 돌아보았다. 균열로 뒤덮인 유리문은 바깥쪽으로 부풀어 있었고 안쪽에는 온통 콜라병뿐이었다. 셀 수 없는 병이 불규칙하고 기괴한 패턴을 그리며 서로를 밀어붙여 공기 하나 통할 틈바구니조차 없었다. 나는 압축된 혼돈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아래층으로 향했다.


10층의 유리벽은 초토화된 건물의 풍경을 비추고 있었다. 폐허 가운데 부유하는 파편들과 부서진 벽과 박살난 가구들이 보이지 않는 초고속 회전목마에 매달린 듯이 빙빙 돌고 있었다. 날아간 벽 너머로 음울하게 구름 낀 하늘이 보였다.

“G-랄맞군.” 멈출 기미가 없는 미니어처 폭풍을 향해 나는 상소리를 중얼거렸다.


캡틴은 나를 잡아끌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LET IT GO, LET IT GO, 바람과 하늘과 함께...”


다음 유리벽에는 ‘7층’이라고 쓰여 있다.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잠깐. 8층이랑 9층은 어디 갔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당장이라도 위층으로 뛰어올라가서 층수를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캡틴이 내 어깨를 꽉 끌어안더니 말했다. “가끔은 세계에 대해 궁그매하지 말아야 할 때도 있다네.”


“놔요!” 나는 몸을 흔들어 캡틴의 완고한 포옹에서 벗어나려 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아야겠다고요!” 낑낑거리고 밀고 발길질까지 하면서.


하지만 캡틴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불가항력으로 아래층으로 끌려내려갔다. “알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은 6층에 다다르자 사그라들었다. 유리벽 안쪽으로 보이는 6층의 내부는 먼지구덩이 그 자체였다. 보기만 해도 간질간질한 것이 재채기가 날 것만 같다.


5층의 내부는 시커멓게만 보였다. 하지만 잘 보니 아주 깊은 어딘가에서 색색깔의 작은 빛이 깜박이는 것 같기도 했다. 눈을 깜박이자 반짝임은 사라져 버려 다시 찾을 수 없었다.


“또 디스코텍에 늦었군.” 캡틴은 한숨을 쉬었다. 복도가 어두워서 하마터면 콜라병을 밟을 뻔했다.


4층에 도착한 나는 비명을 질렀다. 유리벽 안쪽에서 기어오른 바퀴벌레들이 우글우글 벽을 덮고 있었다. 괴기스러운 광경이었다.


“바퀴벌레 온리전이야.” 파일럿이 말했다.


캡틴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자들의 볼풀장에는 들어가지 말게나! 아주아주 작으니까.”


“온리전 예산을 낭비하고 경험 없는 스탭을 쓰면 이런 꼴이 나는 거야.” 파일럿이 거들었다.


3층은 불바다였다. 구름을 이룬 연기와 불티가 방염 유리 뒤에서 일렁거리고 있다. 이 불지옥을 한 층 안에 완벽하게 가둬 놓았다니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방화벽이 과연 얼마나 버텨 줄까. 이 호텔엔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다.


2층의 벽은 맥동하는 새카만 이끼로 덮여 있었다.

“너네는 무리생활하는 야생동물이잖아. 너무 얄팍하게 퍼지면 안 돼.” 파일럿이 말했다. 아마도 이끼에게 말을 건 것 같다.


우리는 호텔의 1층 로비를 가로질러 뒷문 방향으로 나아갔다. 로비 뒤쪽에 있는 수영장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키보드 자판 버튼들로 꽉 차 있었다. 대관절 누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수영장 하나를 글자로 꽉 채운다는 번거로운 짓을 했을까.


캡틴은 내가 수영장에 신경쓰고 있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오늘 밤은 알파벳 수프를 먹고 싶군.”


파일럿은 뒷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엔지를 실은 쇼핑카트를 몇 번이고 문짝에 갖다 박는다는 방식으로 말이다. 문이 부서지다시피 열렸을 때 나는 놀라 숨을 들이켰다. 뒷문 너머에는 주차장으로 보이는 광활한 공터가 있었고, 그 황야가 부자연스럽게 끊긴 자리에 얼어붙은 백사장과 바다가 펼쳐졌다. 천둥을 품은 듯한 음울한 하늘은 수평선에 다다라 아름다운 주황색 일몰이 되었다. 빙해의 표면 위로 빛조각이 명멸한다. 거대한 유조선이 검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섬처럼 저편에 어른거렸다.


“바다?! 어떻게? 우으와아아?” 나는 충격에 빠져 비명처럼 말했다. 캡틴의 말이 옳았다니.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럴 수는 없다. 에펠탑에서 보이는 파리는 분명 내륙이었단 말이다. 이런 곳에 해변 같은 게 있으면 안 된다고. 대체 언제 어떻게 바다가 여기까지 다다른 거지? 생각이 미끄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얼어붙은 바다를 마주보았다.

정면에 보이는 녹슬어 비뚤어진 광고판에는 “Stupidfox와 친구들”의 그림과 함께 “PARADIS PLACE(지상낙원)” 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주차장과 백사장을 가르는 울타리를 넘었을 때 나는 척수를 간질이는 기묘한 육감 같은 것을 느꼈다.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잔잔하게 일렁거리고 있다.

등뒤의 호텔을 돌아보았다. 주차장과 해변 사이의 공기에는 털끝만큼의 변화도 없었다.


“PARA(초월)...DISPLACE(이동).” 캡틴은 이상한 지점에 묘한 지체를 넣어 광고판을 읽었다. 이상하게도 그 표현은 이 모든 것에 대한 완벽한 설명이었다. 왠지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해변을 거닐던 우리는 기묘하게 멀쩡한 해변 노점상을 발견했다. 파일럿은 “마티니 만들기”에 착수했다. 해변의 이편은 망가진 전자기기로 더럽혀져 있었다. 분명 저기 있는 유조선에서 떠내려온 물건들이겠지. 키보드, 모뎀, CD, 다른 고색창연한 전자기기들이 꽁꽁 얼어붙은 파도의 마루와 골마다 붙들린 채 반짝거리고 있었다.

모래밭 위에 수건을 깔고 앉아 일몰을 지켜보고 있자니 전신에 평온함이 깃들어왔다. 조금 뒤에야 나는 해가 이미 져야 마땅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노을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그리고 굳이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바다는 얼어붙었을지언정 모래사장은 따스하게 느껴졌다. 나는 타월 위에서 몸을 쭉 펴며, 보라색으로 물든 구름이 지지 않는 노을의 빛을 머금은 채 느리게 천구 위를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백일몽에 젖어 있던 나는 누군가가 내 수건을 잡아당기는 감각에 정신을 차렸다.


나는 웅얼거렸다. “파일럿. 방해하지 마.”


누군가 내 바로 아래에서 수건을 훅 잡아당기며 나를 옆으로 굴려 백사장에 내던졌다. 울컥해서 일어나 보니 어마어마한 크기의 킹크랩이었다.


“내 수건 내놔!” 평온한 휴식의 시간을 방해당해 머리끝까지 화가 난 나는 킹크랩을 향해 버럭 외쳤다. 수건을 다시 빼앗아오려 한쪽 끝을 틀어쥐었지만 킹크랩은 수건을 놓아주지 않았다. 웬걸, 그놈은 아예 옆걸음으로 나를 질질 끌고 다니며 커다란 집게발을 나를 향해 험악하게 쩔걱거렸다. 몇 분 동안 온 모래밭에 끌려다닌 끝에 폐 가전제품에 부딪힌 나는 쥐고 있던 수건을 놓고 모래 위에 벌렁 나자빠졌다. 노점상에서 마티니를 만들고 있던 파일럿이 이쪽을 보고 낄낄거렸다.

캡틴은 내가 게와 사투를 벌이든 말든 관심이 없는지 덩그러니 놓인 해변 의자에 늘어져 있기만 했다.

나는 노점으로 비척비척 다가갔다.


“뭘로 드릴까요, 손님?” 넉살좋은 바텐더 역할을 맡은 파일럿이 물었다.


나는 물었다. “들어나 보자... 넌 어쩌다 캡틴이랑 만났어?”



Credits

Hugs and love to all our DELICIOUS PATRONS

Art Director:

Vitaly S Alexius

Illustrator:

Etwoo




역주 1. ’대체로 무해한’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인용.

역주 2. '온리전'의 원문은 Con(=Convention). 서브컬처 맥락에서는 주로 특정 관심사를 중심으로 모인 팬들이 발표나 작품 판매 등으로 교류하는 행사를 칭합니다. Comic-Con, 블리즈컨처럼 기업 규모의 큰 것부터 정모 수준의 아주 작은 모임까지 가지각색.

역주 3. StupidFox: RA와 같은 웹코믹 연합 Mepsu에 속한 웹코믹.






'Archiv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pisode 199  (19) 2017.08.23
Episode 198F  (15) 2016.12.12
Episode 197  (19) 2015.11.13
Episode 196  (9) 2015.10.29
Episode 195  (11) 2015.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