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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41, 142









Issue 141


Directorate의 벙커에서 보낸 생활은 까다롭지만 지리멸렬한 보수작업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화장실 배관을 뚫고, 식품 공급관을 뚫고, 발전기를 뚫고, 공기 흡입구를 뚫는 일 같은 것들이었다.

이 중 마지막 건은 그로모프 박사의 옛 삶의 종말점이 되었으며 동시에 캡타니아에서의 엔지의 삶의 시작점이 되었다.


캡타니아에서 보내는 생활은 끔찍한 괴물들에게서 도망치거나, 고통에서 도망치거나, 온갖 고생에서 도망치거나, 캡틴과 실랑이하는 정신력 소모 심한 업무에서 도망치는 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늘 엔지의 사명은 “추운 계절 치우기”였다. 엔지는 이 모든 노력이 얼마나 놀랍도록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설득하려 했으나, 캡틴은 “겨울 끝내기” 과업에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심지어 엔지에게 설득력이 있다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기까지 했다. 어리석은 인간들이 기후를 뒤집어엎어선 무슨 마법 비슷한 것이 아니면 걷어낼 수 없을 만큼 구름을 만들어낸 탓에, 수천 년 내에 새로운 사족보행 괴수가 생겨나 겨울 마무리 의식(儀式)을 행할 것이라나.

엔지는 급속히 바닥나 가는 식량을 걱정하느라 캡틴의 횡설수설에 그리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캡틴이 그 화제로 노래를 불렀을 때 약간 주의를 기울였을 따름이었다. 캡틴의 노래는 곧 봄이 오고 패션 동향도 바뀔 테니 봄을 맞이하고 겨울에게 작별을 고하라는  내용이었다. 엔지의 이름도 곡에 등장했다. 겨울 치우기 과업에서 자기의 직분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하는 신출내기 바보 역할로. 캡틴이 “방사능 괴물이 눈과 얼음 아래 겨울잠을 잔다네” 운운하는 대목을 노래할 쯤 엔지는 가만히 뒷걸음질쳐 문을 닫았다.

“열심히 일하게!” 캡틴의 목소리가 문을 뚫고 날아왔다.

“최선을 다해야 해!” 엔지가 복도를 돌아들며 가장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걸음을 늦춘 엔지는 들고 있던 삽을 물끄러미 보며 이 물건을 계속 들고 다녀야 할지, 이걸로 일을 하려고 노력하긴 해야 할지, 겨울 마무리 같은 짓에 대해 고민하며 괴로워해야 할지 결정하려 해 보았다.


희미하게 웅웅거리는 소음이 그의 머리 위를 맴돌며 주의를 끌었다.

고개를 든 엔지는 기묘한 광경을 발견했다.

붉고 검은 줄무늬가 그어진 벌떼였다. 벌떼는 먼지투성이인 낡은 채광창을 온통 뒤덮은 채 덩어리를 이루어 우글거렸다.

엔지는 죽은 척을 하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벌떼는 기묘할 만큼 한눈에 들어오는 패턴을 그리며 이리저리 기어다녔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엔지를 덮쳤다. 단어였다!


채광창 위에서 벌들이 글자를 만들었다. “ㄴㅔ ㅅㅣㄹㅈㅓㄱㅇㅡㄴ ㅁㅗㄴㅣㅌㅓㄹㅣㅇㄷㅚㄱㅗ  ㅇㅣㅆㄷㅏ."


캡틴이 창문에 어찌어찌 꿀을 발라서 이 소름끼치는 효과를 빚어낸 것인지, 아니면 벌들이 집단지성을 획득할 만큼 진화해 인간과의 첫 교류를 시도하고 있는 것인지 엔지는 바로 확신할 수 없었다. 메시지는 계속 요동치며 분노에 찬 기색으로 출렁거렸다.

확률 계산이 엔지의 머릿속에서 작동했다. 

벌떼의 중량과 낡은 채광창의 내구도 중에 어느 쪽이 우세할까. 

꽃이 다 죽었다면 저 벌들의 주식은 뭐지? 

공황에 빠진 엔지의 양손이 삽을 그러쥐었다. 

벌의 머릿수가 늘어가며 채광창의 창틀은 삐걱거리고 있었다.

엔지의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눈치챘는지 벌떼는 훨씬 더 긴 문장을 만들려는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로모프 박사는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복도에 부츠 소리가 울러퍼지는 순간 채광창은 폭발하듯 깨져내렸고, 날카로운 유리조각과 흥분한 방사능 벌떼가 혼연일체가 되어 쏟아졌다.


밭은 숨을 쌕쌕거리며 엔지는 탑에서 뛰쳐나왔다.

놀랍게도 그 와중 부서져내린 바닥에 빠지지도 떨어진 물건에 맞지도 않았다.

캡틴의 명령에 불복하면 불복할수록 끔찍한 일이 일어날 확률은 점점 높아져 가는 경향이 있는 듯싶었다.


엔지는 이 패턴을 마음에 새긴 뒤, 하릴없이 “겨울 끝내기”를 위한 여정을 떠났다. 등 뒤로는 눈에 파묻힌 삽을 질질 끌면서.



Credits

그림은 멋진 [link]님께서.


(이 와중에 저는 뱀프(*로키 산맥의 관광지)에서 얼어붙은 빙하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나중에 배경으로 쓸 듯싶네요.)



















































Issue 142



ENTRY 57801__2245 : 최고 관리자 : 알렉산더 그로모프 박사 : 


"엔지! 동물들을 깨웠을 땐 침착하게 행동해야 하잖나! 아이스 스케이팅과 둥지 만들기에서는 좀 더 좋은 실적을 보여주길 바라네!" 내가 어디에서 왜 가장 고귀한 삽을 두고 왔는지 설명하자 캡틴은 이렇게 쏘아붙였다.


"자넨 삽 교체에 얼마나 비용이 드는지 알긴 아는 겐가?! 

또 사업 대출을 받으러 가야 하게 생겼어! 은행장은 이미 날 벌레 보듯 하며 말도 섞지 않는단 말일세!" 캡틴은 계속 윽박질렀다.

포토샵이 삽 대신 나를 먹어치웠다면 캡틴은 조금 덜 분노했을 듯싶다.


그 동물이 포토샵이 맞긴 맞았던가? 좀 더 크고 길어 보였다. 요사이는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어느 날 식중독이나 다른 독소에 굴복해 인생의 끝을 맞게 되지 않을지 두렵다. 

어쩌면 나는 있지도 않은 것을 보고는 절벽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 아니면 크레바스로 미끄러져 서서히 깊고 깊은 곳으로 묻혀들어서... 아무도 나를 찾지도 돕지도 못하게 되거나. 

흐으. 

요즘 들어 심한 염려증과 더불어 격한 눈 공포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느낀다.  삽 먹는 괴생물체와 마주친 이후로는 가는 길마다 진로에 돌을 던지고 돌이 빠져들지 않는 곳만 디디고 있다. 

저 아래에 어떤 끔찍한 것이 도사리고 있지 않을 것이라 절대 낙관할 수 없다. 

절대.


다행히도 내 설(雪)공포증은 스니피와는 전혀 다르다. 그는 겉보기엔 침착해 보이지만, 가끔은... 어휴.

저번에 커다란 눈송이가 렌즈 위에 떨어졌을 때 그가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언행을 보였던 적이 있었다. 그는 별안간 질겁해서는 손을 내젓고 비명을 질렀다. 영락없는 광인의 발작이었다. 캡틴이 그의  주의를 흐리기 위해 마스크에 차를 끼얹었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심지어 그 다음에는, 그는 살아있는 눈송이 운운하며 눈송이가 그의 렌즈를 뚫고 체액 샘플 채취를 위해 제 머리에 구멍을 내려 했다고 호소했다.

"눈송이를 조심하세요." 찰스는 이후에 내게 말했다. "방심하면 안 돼요!"


"눈송이가 뭘 한다는 거요? 날 태워다 북극쯤으로 옮겨다놓나?" 나는 농담조로 대꾸했다.


"전 진지해요!! 제정신이라고요! 미친 소리로 들릴 건 압니다만 눈송이가 저희를 전부 죽일 계획을 짜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는 광인 같은 동작으로 팔을 내저으며 외쳤다.


 스니피의 정신건강이 걱정스럽다. 캡틴은 맥락 없는 명령으로 그의 비이성을 부추기기만 하는 상황이다. 내가 등을 보인 사이 스니피가 내 등을 모종삽으로 찌르지 않기를 기원하고 있다. 만에 하나 그자가 내 삽의 크기를 지독하게 질투한 나머지 눈송이 하나 분량의 자극만으로 선을 넘게 된다면 어떻게 될는지... 

만약 그 자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낸다면, 나를 기억하면 어떻게 될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추리해내면 어쩌지? 

만약 그가 내 본명을 이미 알고 있고, 나를 공격하기에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고, 내가 그에게 저질렀던 모든 일에 대해 그가 옛 상관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면?


나는 찰스 스니피가 두렵다. 진심으로 두렵다.


그는 언제나 캡틴이 지닌 하트 컵을 힐끔거린다. 마치 컵에서 다리가 자라나서 뚜벅뚜벅 걸어가 버리거나 할 듯이.


"원. 그냥 컵이잖아요, 진정하쇼" 나는 그에게 말했다.

"안 돼요." 그는 대답했다. "어딘가 거슬려요! 속내를 알 길이 없단 말입니다! 저걸 신뢰해도 되는지 아닌지 확신이 안 서요!" 그는 아예 우기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기로 스니피의 정신상태는 서서히 캡틴과 비슷해지고 있는 듯하다. 무생물과 대화하고, 이상한 이야기를 지어내고, 아무것도 없는데 소리를 친다. 최근 나는 스니피가 윽박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난 살아있다니까! 뭐? 아니라니까! 네가 무슨 짓을 했다고? 어쨌든 난 확실히 살아있고 네가 나한테 한 짓이 무엇이든간에 난 알 바 아냐!" 스니피는 언성을 높여 말했다.


나는 벽에 난 균열 사이로 그를 넘겨보았다. 또 다른 이야기에 빠져 있음이 분명했다. 한쪽뿐인 대화나 그의 손짓을 관찰한 나는 그가 제 스카프와 대화를 하고 있다고 짐작했다.


"난 인간이야! 그냥 평범하고 싶다고!" 

스니피는 소리쳤다. 

"질문 좀 그만해!

"너무 늦었다니?!

"제발 부탁인데 등뼈 좀 가만히 놔둬!"

"내 간 돌려놔!

"내장 좀 이리저리 옮겨놓지 마!

"뭐?!

"하지 말랬잖아!

"됐다니까! 금속 같은 걸 먹고 싶을 리가 없잖아!"

"팔다리가 17개 달리는 게 얼마나 편하건 말건 난 관심 없다니까!"


스니피는 스카프가 그에게 불사를 비롯한 초능력 같은 것을 주려 하고 본인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을 상상하는 듯했다.

나도 어릴 적에 누군가 내게 초능력을 권하기를 꿈꾸었었지. 하아.

이런 식이다. "좋았어, 불사신이 되고 10배 세지고 싶어." 나는 언제나 주인공들이 위대한 힘을 손에 넣지 않고 인간으로 남기를 선택하는 소설이 싫었다. 내가 7호 계획, 진짜 영웅을 찾는 계획을 만든 이유 중 하나였다. 비록 그 영웅이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초월적 행운이라는 능력이 놀랍도록 가닥 없고 속편한 얼간이를 빚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았어야 했건만.

나는 그른 일을 한 것인가? 아마도.

나는 그 검색 쿼리를 가동한 일로 인류를 멸망시킨 것인가?

어쩌면.


이제 도시는 죽었으며 내 희망과 꿈은 산산조각나 방사능에 절었으니, 나는 나 자신의 목숨 말고는 아무것도 붙잡을 것이 없다.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죽음은 두렵다. 끔찍하게 두렵다.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썩은내가 나는 수십 년 묵은 참치 통조림이라도 목구멍에 밀어넣을 것이다.

...캡틴과 붙어 있는 이상, 죽음의 그늘진 포옹을 피해 살아남을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 내가 캡틴의 주변에 머무르거나 캡틴이 내리는 임무를 수행하는 한, 캡틴이 나를 필요로 하는 한, 언젠가 모든 일이 괜찮아지겠지.





Credits


그림 : 저, 그리고 멋진 러시아 아티스트인 [link] 

캡틴의 두 대사는 포럼에서 "GeneralConfusion" 님과 "WhimsicalSchme" 님께서 남겨 주신 코멘트에서 따왔습니다.





역주. 141화의 '사족보행 괴수'는 <마이 리틀 포니>. 137화에서 언급된 에피소드와 같은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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